본문 바로가기
회복하는 글쓰기

도움을 구하는 이가 먼저 돕는다(2)

by 종업원 2018. 3. 18.


한데서 부르는 이름




김윤아의 네번째 솔로 앨범 <타인의 고통>(2016)은 어딘지 알 수 없는 ‘한데’서 시작 한다. 가까운 곳에서 부는 바람, 아득한 곳의 물결, 저 멀리서 내려치는 번개 소리가 44초 동안 흐르면 누군가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노래는 시작된다.[각주:1] 너의 이름 노래가 되어서 / 가슴 안에 강처럼 흐르네 / 흐르는 강을 따라서 가면 너에게 닿을까 / 언젠가는 너에게 닿을까 누군가를 잃은 이는 더 이상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 없는 적막은 그이가 곁에 없다는 현실을 무섭게 짓누르기 때문이다. ‘내’가 더 이상 부를 수 없는 ‘너’의 이름이 노래가 되어 세상에 흐른다면 무거운 바위가 짓누르고 있는 너의 이름이 마음 속에 흘러들어와 내 안에서 강처럼 흐르지 않을까. 그 강을 따라 가면 언젠가 ‘너’에게 닿을 수 있지 않을까. 김윤아가 한데서 애닳게 노래를 시작하는 까닭은 누군가가 더 이상 부르지 못하는 이름을 (노래로) 부르기 위해서다. 그런 노래는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부를 수밖에 없다. 진혼곡(鎭魂曲)이 흐르기 전의 ‘한데’는 어디였을까? 바람과 물결과 번개가 있던 한데에서 44초 간 흘렀던 침묵은 애도라는 이별례였을 것이다. 그이가 서 있던 곳이 ‘오늘의 한데’, 진도 팽목항 앞이었다면 말이다. 떠난 이의 이름이 ‘강’처럼 흘러야 했던 이유. 바다에 가라앉아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린 이들이 노래로 이은 강을 따라서라도 돌아왔으면 하는 염원을 담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돌아올 수 없다고 해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불렀던 이들의 마음 속에서나마 마음껏 흐를 수 있게.



그치지 않는 비, 꺼지지 않는 불


<물속 골리앗>에서 내리던 긴 장마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형벌이거나 가난한 사람부터 휩쓸리게 되는 사회적 재난의 은유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 비가 어디선가 타고 있는 불을 끄기 위한 것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땅에 불 타고 있는 것,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한꺼번에 많은 비가 내려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비는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 남일당 건물 위 망루에서 타올랐던 이들 위에 먼저 내렸을 것이다.[각주:2] 그러나 끌 수 없는 불. 그래서 계속 내리는 비. 수직 하강하는 비는 땅에서 차오른다. 비가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린다면 그건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었겠지만 소설 곳곳엔 아직 삼켜지지 않는 것들이 흘러 넘치고 있다. 물에 잠긴 세상 위로 떠오르는 진실이 있다. 유일하게 온전해보는 골리앗 크레인은 “전 국토가 공사 중”(112쪽)이었음을 알린다.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농성중이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121쪽)이었음을. 살기 위해, 여기 사람이 있음을 목숨을 걸고 알리기 위해 더 위태로운 망루로 올랐지만 그곳에서 그이는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고립되었다. 홀로 매일 매일 바싹 타 들어갔던 이, 삶을 태워 ‘생존자’가 있음을 알려야 했던 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높은 곳에 올라 구조 요청을 했던 이가 물에 잠긴 오늘의 세상에서 구조 요청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구조 요청’이라는 세상의 말을 지켜내고 있던 이는 오래 전부터 ‘구조 요청’을 하고 있던 이다. 


  




기다리는 이, 지켜내는 이


존재의 뿌리가 뽑혀 속절없이 흘러가버릴 때[각주:3]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올랐던 이는 이제 그곳에 없다.[각주:4]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나’가 절망 속에서 다시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구조 요청’은 무기력이나 절망의 신호가 아니다.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 없이, 언젠가는 가닿을 수 있다는 의지 없이 ‘구조 요청’이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다. “농성중이라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을 좇아 ‘나’는 크레인 위를 오른다.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제 ‘나’가 그곳에 남게 된다. “누군가 올 거야.”(126쪽) 세상은 물에 잠겼다. ‘나’가 기다리는 건 ‘구조대’가 아니다. 골리앗크레인에 이를 수 있던 것은 누군가가 이곳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올 거야’라는 염원이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구조 요청’은 언제라도 무력해질 수 있는 염원을 지켜내는 의지다. 하늘에서 땅으로 형벌처럼 수직으로 내리 꽂던 비는 땅위의 것을 집어삼키며 차오른다. 차올라 수평적으로 흐른다. ‘나’가 기다리는 것은 하늘에서 오지 않는다. 물살을 타고 떠내려오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이 튼튼한 뗏목을 타고 올지, 겨우 손만 뻗고 있는 무기력한 존재일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지켜내고 있다는 점이다. ‘나’가 크레인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는 건 도움을 구하는 이가 먼저 도와 왔기 때문이다.  



대피소에서


304명 모두를 구할 수 있었지만 구하지 못했던 참담한 사건. ‘416 세월호’라는 장소에서 사람들을 구한 건 구조 요청을 한 세월호를 타고 있던 이들이었다. 어린 남매를 찾는다는 선내 방송에 “애기, 여기 있어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이들은 배와 함께 기울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이었다.[각주:5]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폭로되고 촛불정국으로 번질 수 있었던 ‘사라진 7시간’이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일 수 있던 심지는 오래전부터 홀로 촛불을 들고 있던 416 세월호 유가족들로부터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생존자들은 더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갇혀야 했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 스스로를 옭아매야 했다. 침몰하는 배를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했던 이들, 그 영상이 망막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은 이들, 생명의 이치와 가치가, 듣고 쓰고 말하는 문법이 파괴된 곳에 감금된 사람들. 슬픔은 어째서 감옥이 되는가. 어째서 전염병이 되어 사람들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내쫓겨야 하는가. 


<입동>은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어 더 이상 ‘집’에 살 수 없는 한 부부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언제라도 ‘집’이라는 세상이 무너질 수 있는 지금, 이곳,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푸어(poor)’ 라는 서술어가 주관하는 세상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집’이라는 작은 세상을 가꿀 수 있었기에 행복을 지켜낼 수 있던 사람들. 돌이켜보면 김애란의 소설은 자취방과 월세방, 원룸과 투룸, 반전세에서 대출을 낀 전세로 옮겨다녔던 여정기였다. 그렇다고 <입동>이 이 ‘이주(移住)의 마라톤’ 결승점에 ‘하우스 푸어’라는 메달이 기다리고 있음을 냉소하고 있는 소설인 것만은 아니다. ‘방’과 ‘집’은 어떻게 해도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한 분투의 현장이었지만 <입동>은 그런 ‘삶의 현장'이 파괴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가난’보다 더 지독한 ‘재난’이 모든 이의 방과 집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부가 조금 더 좋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면, 영우가 사립 유치원에 다녔다면 불의의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행이 우리 집에만큼은 방문하지 않길 모두가 염원하지만 <입동>은 한 가족을 덮친 불행보다 더 가혹한 불행이 이 세상을 덮쳐버렸음을 말하고 있다. 슬픔을 입밖으로 낼 수 없고, 그곳에 머물 수도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곳의 슬픔은 감기보다 못한 것으로 치부된다. 오랫동안 슬퍼하는 일은 손쉽게 꾀병이나 의지박약의 문제로 호도되고 때때로 더 그럴 듯한 걸 받아내기 위한 꼼수로 비하된다. 슬픔이 추방된 곳엔 ‘집이라는 세계’도 무너진다. 주디스 버틀러가 언급한 것처럼 슬픔은 언제나 ‘나’와 ‘우리’라는 제한된 영역을 넘어 범람한다. 나와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상실의 경험은 이곳에서 영위되는 삶이 이미 우리 너머에서, 다른 삶에 이양되어온 것이거나 연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각주:6]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무너지는 삶은 존재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이때의 취약성이란 나약함의 사적 지표가 아니라 구성원들 개개인의 삶이 이미 연루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증표다. 중요한 건 슬픔의 규모나 크기가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는 장소의 특질에 있다. <입동>에서 슬픔은 고립되어 있거나 언제라도 추방될 수 있는 형편에 놓여 있다. 

봄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영우’를 기리지도, 슬퍼하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잊지도 못하는 한 부부의 감금 상태는 다음과 같은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입동>, 37쪽) 더럽혀진 벽면을 덮으려는 이 부부의 도배는 보기 싫은 것을 감추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감금의 상태에서 나오고자 하는 필사의 노력이다. 그걸 두고 훼손된 집을 고치기 위한 ‘수선’이라고 부를 수 없다. 슬픔 이후의 ‘도배’는 영우가 남겨 놓은 인디언 천막처럼 나약하고 볼품 없지만 누군가의 온기가 남아 있다. 제 이름조차 다 쓰지 못한 불완전한 글자를 발견하고 이후에 무엇이 쓰일지 알 수 없더라도 부서진 그 글자를 돌보는 일. 나는 그것을 대피소를 짓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두 부부의 도배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회복하는 글쓰기] Ⅰ. 단편소설과 함께 비평 쓰기 2강 강의록_2018. 1. 29






  1. 앨범에는 1번과 2번 트랙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1번 트랙은 본래 2번 트랙 ‘강’의 인트로 부분이다. 라디오나 방송에서 틀 때 노래가 나오지 않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 염려 되어 트랙을 나누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2009년 6월 9일 188명의 한국 작가들은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작가 선언을 한다. 그 선언들 속에 김애란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거짓된 빛의 세계, 새는 깃 속 어둠으로 난다.” [본문으로]
  3. “그보다 좀더 먼 곳에서 웬 시커먼 물체 하나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뭔지 잘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였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는 나무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집 앞에 있던 거라 모를 수가 없었다.”(114~115쪽) 비대한 도시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제 몸을 불려가기 전부터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는 그곳에 있었다. <벌레들>에도 잘려나간 거대한 나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어느 여염집 마당 한가운데 억척스럽게 솟아 있던, A구역의 유일한 나무. 몇 살을 먹었는지 모르는,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았을 게 틀림없는 고목. 바람이 불 때마다 신령스럽게 출렁이던, 오늘 아침 잘린 나무...... (중략) 그렇게 막 나무의 뿌리 부분을 지나던 찰나, 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엄청난 양의 곤충이, 벌레가, 유충이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길게 줄 이은 벌레들의 행렬은 갈래를 뻗어 재앙처럼, 혹은 난민처럼 도시로-도시로-퍼져 가고 있었다.”(<벌레들>, 78쪽) 잘린 나무 속에서 기어나온 무수한 벌레는 불길한 기운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함께 제어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의 흘러넘침을 의미하기도 한다. 장마로 불어난 물살로 인해 비로소 떠오르는 것들처럼 그간 보이지 않았던 벌레들은 근원적인 세계의 붕괴라는 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들끓고 있는 알 수 없는 힘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이곳에 거대한 나무는 없다. 나무가 있던 자리에 크레인이 있을 뿐이다. 오래된 나무를 둘러싸고 있던 정령들은 사라졌지만 크레인 위엔 누군가가 있다. 저 높은 곳에 홀로, 사람이 있다. [본문으로]
  4. ‘목숨을 구한다’는 말엔 두 가지의 의미가 겹쳐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환경으로부터 구(救)해내는 의지적인 행위와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기에 또 다른 이에게 도움을 요구하거나 요청한다는 점(求)에서 그러하다.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 행위에서 ‘수동’과 ‘능동'을 구별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본문으로]
  5. 세월호가 기울어 가라앉고 있었을 때 단원고 손지연 학생이 찍은 동영상에 담겨 있던 목소리는 ‘6살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찾고 있으며, 아이를 발견한 사람은 소리 쳐서 위치를 알려 달라’는 선내 방송을 듣고 아이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여학생들이 외친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오준호, <세월호를 기록하다>(이지북스, 2015) ; 416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다시 봄이 올 거예요>(창비, 2016) ;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세월호, 그날의 기록>(진실의 힘, 2016)을 참조. [본문으로]
  6.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 <불확실한 삶>, 경성대학교출판부, 2008.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