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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없는 것들 속에서 생겨나는 것

by 종업원 2018. 4. 2.


조금 힘 없이, 조금 투명해져서


낡고 쇠락한 주택들이 있던 곳은 어느새 모텔촌이 되어버렸지만 그 한 귀퉁이에 작은 카페가 마치 대피소처럼 간판도 없이 희미한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곳은 간판만 없었던 게 아니라 그 흔한 음악조차 없었다. 대신 믿을 수 없을만큼 작고 이쁜 고양이가 있었고, 다른 곳에서라면 들리지 않았을 법한 소리(음)들이 있었다. [회복하는 글쓰기] 2차 강좌는 음악이 없는 카페, ‘매일이 다르다’에서 시작되었다.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음악 없는 카페’를 여는 일은 불가능한 시도처럼 여겨지지만 어쩌면 한번도 찾아보려고 한적이 없었기에 그저 없었을 뿐 ‘음악이 없는 카페’는 그곳에 있었다. 음악이 없었기에 있을 수 있었던 소리들과 함께. 카페 전체를 둘러싸고 있던 크고 작은 소리들이 처음에는 소음처럼 들렸지만 서서히 구체적이고 고유한 소리로 바뀌어가는 경험을 그곳에 모였던 구성원들도 느꼈을까. 작은 소리가 점점 증폭되는 진기한 곳에서 사람들이 나누었던 말, 이야기, 목소리는 그곳을 둘러싸고 있던 소리들을 뚫어내거나 밀어내 공간을 장악하기보단 조금은 힘 없이, 그래서 조금 더 투명해져서 카페 이곳 저곳으로 난반사 하지 않았을까. 별다른 인테리어가 없어 휑해보이던 카페의 벽면에 튕겨지기도 하며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음주 목요일 저녁 7시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누군가 허리숙여 줍(듣)지 않으면 이내 사라져버릴 목소리의 희미한 빛이 카페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연약한 숨을 내쉬며 누군가의 인기척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한켠에 조용히 앉아 작은 고양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주인장의 눈길처럼 가쁜 생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대로 돌보지 못해 상처 입고 병든 각자의 ‘작은 고양이’를 품속에서 조심스레 꺼내어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 서로가 서로를 작은 고양이처럼 바라보며 눈길로 돌보는 시간. 음악이 없는 작은 카페에 사는 고양이는 자라지 않아도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은 고양이의 발자국 소리를 환하게 들을 수 있다.   

 


토마토처럼, 청포도 껍질처럼


첫 모임이 있던 날, 나는 그곳에서 청포도 주스를 한 잔 마셨고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 이 청포도 주스가 이곳에 대한 첫 인상이 될 거라는 것을 희미하게 예감했다. 청포도의 껍질이 입안 곳곳에 끼고마는 주스를 내어주는 곳으로 말이다. 모임을 진행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빨 사이에 끼는 포도껍질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지만 내 앞에 놓인 청포도 주스를 한 모금도 그대로 넘기지 않았던 이유는 깔끔한 포도 알맹이가 아닌 상그러운 포도 껍질의 부대낌이 이상하게 반가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철거되어버린 대학원 열람실 앞의 벤치에서 '토마토를 먹을 땐 손이나 입에 묻히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관계라는 것이 꼭 그런 것이지 않을까'라고 내게 말을 건네주었던 오래 전의 한 선배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철학자 김영민은 한 공부 자리에서 나왔던 이 말을 재서술해 [관계의] ‘물듦’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고작 보이지 않는 입안에서 일어나는 부대낌에 불과했지만 그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토마토가 되어 잠시 희미하게 물들고, 청포도 껍질이 되어 조금은 불편하게 부대끼며 작은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까. 



가만히 곁에 있음

작고 연약한 것들이 남기는 흔적을 알아차릴 수 있는 장소에 각자의 생활도 있을 수 있다. 작고 이쁜 고양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것과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건 비슷해보이지만 그 사이엔 다른 결이 있다. 이뻐하는 것만으론 생명을 지킬 수도 키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곁에서 가만히 지켜본다는 것은 무엇보다 ‘곁에 있음’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주변의 위험을 미리 차단하며 때로는 어떤 어려움에서 구해야 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누군가의 연약한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일이, 연필처럼 지워지기 쉬운 문장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일이 그와 비슷한 것이라 생각한다. 작은 고양이 곁에 가만히 머무는 것에서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생활을 돌보며 때론 누군가를 구하는 순간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없는 것들로 채워진 장소에서 천천히 생겨나는 것들과 잠시 어울려 희미하게 물드는 시간. 그곳에 모인 모두를 향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순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음을 가만히 예감한다.



_[회복하는 글쓰기] Ⅱ. 삶을 가꾸는 생활 칼럼 쓰기 1강(2018. 3. 29)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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