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복하는 글쓰기

'회복하는 세계'를 비추는 등대 : 마을, 곳간, 대피소

by 종업원 2018. 4. 16.


1

내 눈앞에 있는 가족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너머에 있는 마을에 이끌려 지낸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 때문일까? 가족은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가 된 것 마냥 대면과 응시로 마주해야 했던 순간들을 짐짓 모른 척해온 탓에 점점 더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간다. 가족 앞에서 울지 못하고 텅 빈 집에서 손 쓸 수 없는 가족을 생각하며 홀로 운다. 내가 이끌리고 있는 마을이 가족을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제 있었던 마을이 오늘은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며 몸을 움직일 뿐이다. 마을을 증명하고 있는 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하나 밖에 없다. 육식동물을 피해 산허리까지 내려온 초식동물이 강 너머의 희미한 불빛을 보고 잠시 생의 의지를 붙들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살고자 한 마을엔 나약해서 더 맹렬히 제 몸을 흔드는 깃발 하나 뿐이다. 이 깃발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조난 신호 같다가도 때론 어디선가 조난 당한 누군가에게 보내는 구조 요청에 대한 응답 같기도 하다. 대피소의 불빛처럼, 긴박한 소식을 알리는 봉화(烽火)처럼, 잠깐의 타오름을 위해 제 몸을 불사르는 불꽃처럼, 깜깜한 밤에만 보이는 별자리처럼 내가 사는 마을의 깃발은 작고 나약해서 쉴 틈이 없다. 



2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야마시타 노부히로, 2007)만으로 깃발은 나부낀다.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만으로도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 깃발 아래로 사람이 모이면 ‘오늘의 마을’이 열린다. 오늘의 마을은 ‘곳간’을 닮았다.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찾아오는 이가 있고, 들고 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마을-곳간은 풍성해진다. 이 곳간에 곡식이나 종자가 있어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아니다. 곳간에선 나눌 수 있는 것이 발명된다. 각자의 고유한 이력 속에서 자연스레 쌓인 것이 죄다 곡식이고 종자다. 이 나눔의 발명 속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유일한 것이 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 존재의 무게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재산이 된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저마다의 힘으로 말이다. 곳간에 무엇이 쌓이고 남아 있는지, 또 무엇을 나눌 수 있는지는 사람이 찾아올 때만 알 수 있다. 들고 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타전처럼, 주문처럼, 북소리처럼 각자의 곳간을 깨운다. 그러니 곳간의 주인은 ‘나’가 아니다. ‘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마을의 깃발을 자주 쳐다보는 사람이며 그 깃발 아래에 곳간 같은 마을이 있음을 알리는 사람이며 자주 그곳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잠시 마을의 주민이면서 가끔 주인이 되는 사람이다. 



3

가끔은 곳간이 대피소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라도, 무엇이라도, 누구라도 무너지고 쓰러질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절실한 것은 미래나 희망이 아니라 오늘을 지켜줄 수 있는 대피소다. 대피소에선 사소하고 별볼 일 없어보이는 것이 사람을 살리고 구한다. 한 잔의 물, 한 마디의 말, 몸을 덮어줄 한 장의 담요, 어느 날 마침내 우연히 하게 되는 각자의 이야기 한 토막, 소중 했던 기억 한 자락. 기어이 대피소에 당도한 우리는 그제서야 마음 놓고 몸을 벌벌 떨 수 있다. 벌벌 떨리는 몸이 곧 진정되리라는 것에 안심하면서 ‘회복’이라는 미래의 시간을 예감하고 예비하게 된다. 회복은 과거를 지우거나 부정하지 않고도 오늘을 마주할 수 있게 하며, 무엇이 올지 알 수 없다해도 미래를 향해 기꺼이 손을 뻗고 발돋음할 수 있게 한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가지고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대피소의 희미한 불빛은 회복하고 있는 존재들의 몸(flesh)의 어울림이 만들어내는 발열에 가깝다. 누군가의 작은 ‘두드림’만으로도 금새 깨어나는 힘들이 서로를 붙들 때 그 맞잡음이 온기(溫氣)가 되어 대피소를 데운다. 세상의 모든 대피소는 오늘의 폐허를 뚫고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듯보이지만 이미 도착해 있는 '회복하는 세계'를 비추는 등대 역할을 한다.



_[회복하는 글쓰기] Ⅱ. 삶을 가꾸는 생활 칼럼 쓰기 2강(2018. 4. 5)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