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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투 트랙(two track)의 이정표

by 종업원 2018. 5. 13.


윤경화 님의 <달리면서 나 홀로 생각하는 것들>을 읽으며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로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임홍빈 옮김, 문학사상사, 2009)를 책장에서 찾아 옆에 펼쳐두었습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와 러닝 메이트(running mate)라는 두 요소가 경화 님의 글을 이끌고 있는 중요한 동력 장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달리고 있는 이에게만 잠시 찾아오는 어떤 정점의 순간과 달리는 동안 감응할 수 있는 동료라는 두 소요가 경화 님의 달리기가 ‘고독’과 ‘우정’ 사이를 교차하는 작업처럼 읽혔습니다. 혼자이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였으면 하는 바람이 달리기라는 세계 속에서 밀고 당기며 만들어내는 긴장감을 글에서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매년 마라톤과 트라이애슬론(triathlon 수영, 도로 사이클, 마라톤을 함께 하는 경기)에 참여하고 있는 하루키에게 달리기란 끊임 없이 쓰고 끝까지 쓸 수 있는 ‘소설가의 몸’을 유지하기 위한 수행처럼 보입니다. 소설과 마라톤을 비유가 아닌 생활의 형식으로 조형해나간 세월은 그 자체로 하루키의 회고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합니다. 재능과 집중력, 그리고 지구력까지 겸비한 작가 겸 러너인 하루키는 만약 자신의 묘비명에 넣을 내용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말을 써놓고 싶다고 말하며 책을 마칩니다. 이 묘비명은 이미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하루키가 소설을 쓰는 태도이기도 할 것입니다. 비범이란 대단하고 거창한 것을 통해서가 아닌 평범 속에서만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겸양을 갖춘 구절 속엔 보이지 않는 실패와 좌절의 이력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소설을 쓰면서 끝내 ‘비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매순간 자신의 한계와 대면해야 했던 달리기라는 형식을 곁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설 쓰기와 마라톤이라는 투 트랙(two track)으로 만든 하나의 문장(“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에서 저는 ‘생활 습관, 생활 비평, 생활 철학’의 연쇄를 봅니다. 생활 없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생활만으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생활’은 미루어두었다가 ‘나중에’ 처리해야 할 부차적인 영역이 아니라 삶이라는 투 트랙에서 한 축을 담당할 때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배우고, 생활을 통해 깨치며 생활에 기대어 버텨낼 수 있습니다. 늘 가려져 있는 생활이라는 영역을 삶의 중요한 추진체라는 지위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삶은 생활이라는 톱니바퀴와 맞물리지 않고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생활은 한번도 ‘생활만’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청소를 하거나 식사를 준비할 때에도 그 행위는 언제나 또다른 행위와, 또다른 의욕에 맞물려 있었습니다. 각자의 생활을 선명하게 감각할 수 있다는 건 그 생활과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또다른 트랙의 형태를 매순간 감지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라톤과 소설이 맞물려 돌아가는 하루키의 투 트랙처럼 ‘생활’이라는 트랙은 아직 그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각자의 역량이 잠재되어 있는 영역에 가닿을 수 있는 유효한 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_[회복하는 글쓰기] Ⅱ. 삶을 가꾸는 생활 칼럼 쓰기 3강(2018. 4. 12)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