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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회복하는 글쓰기 : 다시 시작하는 생활의 장르

by 종업원 2018. 10. 7.

 

아무리 힘을 내어봐도 ‘어쩔 수 없는’ 세계에서 정처없이 흔들리고 흐트러지면서도 끝까지, 똑바로 걸어나가고자 했던 일본 전후(戰後) 여성들의 삶을 ‘고유한 세계’로 구축해나간 감독, 나루세 미키오. 결혼을 네 번이나 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한 여성이 보살폈던 가족의 모습을 담은 1952년작 <번개>의 마지막 시퀀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다. 3녀 1남의 남매 모두 아버지가 달랐던 이유는 혼자 힘만으론 자식들을 키워낼 수 없었던 전후의 궁핍한 환경 때문이었다. 막내 딸 기요코(다카미네 히데코)는 무능력한 오빠와 허영에 찬 언니들, 아둔하고 어리석게만 보이는 엄마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꾸리고자 버스 차장으로 일하며 독립한다. 며칠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미츠코(둘째 언니)의 소식을 묻기 위해 기요코의 하숙방으로 찾아온 엄마에게 막내 딸 기요코는 그간 참고 있던 울분을 터트린다. 

 

 

기요코 : “엄만, 자신이 딱하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엄마 : “걸핏하면 행복 소릴 하네. 행복이 맘대로 되는 거냐?”

기요코 : “그래서요? 적어 노력은   있잖아요! 엄만 희망 없이 사시는  같아요. 그래서 우리들 모두 희망 없이 되는 대로 살아요.”

엄마 : “ 혼자서 너희들 키우느라 고생을 엄청 했다.” 

기요 : “누가 그러라고 했나요?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엄마,   아버지한테 자식들을 두지 않으셨어요? (중략) 살아가면서 한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울음)

엄마 : (흐느끼며 운다)

 

 

두 모녀의 울음이 가득한 하숙방으로 그간 동경해왔던 이웃집 남매의 거처로부터 피아노 소리가 흘러든다. 잠시 감정을 추스리며 아련하고 행복해서 마치 다른 세계로부터 도착하는 것 같은 피아노 선율을 듣던 중 흐린 하늘에 갑자기 번개가 두 차례 내려친다. 기요코는 일어나 옷장으로 가 저금 통장을 펼쳐 엄마에게 자랑한다.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줄 저금 통장을 펼쳐보이며 더운 여름 날임에도 두꺼운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엄마를 위해 유카타를 사주겠다고 하자 엄마는 눈물을 그치고 좋은 걸로 사줘야 한다며 아이처럼 말한다. 이내 활짝 웃는 두 모녀. 속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전환의 힘’이 나는 늘 경이롭고 부럽다. 자식들로부터 외면 받고 마음 속으로 의지하고 있던 막내 딸까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음을 알게 된 엄마가 서러움을 쏟아낼 땐 묵히고 썩힌 이 갈등을 해결할만한 실마리조차 찾기 어려워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나루세는 인물들의 갈등을 봉합하지 않되 현명하게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모녀가 내장하고 있는 ‘전환의 힘’은 삶에 대한 신뢰와 살아 있음을 긍정하는 생의 의욕을 밑절미로 하는데, 깊은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갈등의 순간을 해소의 국면으로 전환하는 탁월한 힘은 한바탕 울고 난 뒤에 다시금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발명해내는 우리네의 일상적 능력을 떠올리게 한다. 팽팽한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는 예민한 집중력 대신 실없이 풀어놓아버리는 이완의 능력은 쉽고 어설프게 갈등을 봉합해버리는 게으름으로 타락하지 않고 예열 없이 곧장 생활에 바투 서게 한다. 미치코가 집에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며 일어나는 엄마에게 뜯어놓았던 찐빵을 잊지 않고 건네는 짧은 순간은 기요코에게 체화되어 있는 생활의 능력이 ‘번쩍’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군림하거나 이김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돌연 화제를 전환하는 이완의 탁월성을 가진 이들의 능력이 게으름으로 타락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힘의 출처가 생활의 감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껍고 낡은 기모노 소매 아래로 찜빵을 챙긴 채 두 모녀는 어둡고 가난한 골목길을 함께 걷는다. 앞서 걷는 엄마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줍는다. 은화인 줄 알았는데 맥주병 뚜껑이라며 아쉬워 하는 장면을 두고 허망한 것들만을 좇아온 전전(戰前) 세대의 상징적 표정으로 읽어내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이 장면을 ‘회복하는 사람’에 대한 탁월한 묘사라 생각한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올리는 동력은 막내 딸과의 갈등이 해소된 뒤라는 감정의 이완 상태로부터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여 그것을 잡아채는 힘은 그 무엇도 허투루 버리거나 쓰지 않는 생활 태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회복’은 단순히 좋았던 상태를 되찾거나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무너졌던 이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청소나, 밥짓기, 목욕, 산책과 같은 것들인 이유는 우연이 아닌데, 회복은 우선 무너졌던 ‘생활’을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생활 속엔 오직 자신만이 감각할 수 있는 이력이 쟁여져 있기에 잠재된 그 힘을 다시 깨우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을 감각하는 것, 생활에 언어를 부여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생활을 돌보고 키워가는 것은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아 얼핏 무용하거나 부차적인 일처럼 보이지만 누구도 알 수 없는 내밀한 영역을 오직 자신의 걸음을 통해 이른다는 점은 중요하다. 서둘러 포기해버리거나 잃어버렸던 것을 제 걸음으로 다시 찾아가는 일. 세상의 모든 글쓰기는 회복의 걸음에 닿아 있다.  

 

저마다의 이력 속에서 조형되는 생활은 각자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어서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미지의 장르다. 무너졌던 생활을 일으켜 세우는 회복이라는 행위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일상적으로쉽게 사용하는 것에 반해 회복이라는 말의 구체적인 결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부족하다. 그건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더불어 공유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회복기(恢復期)  회복기(恢復記) 수밖에 없다. 생활을 일으켜세우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narrate) 각자의 내밀하고 은밀한 영역을 스스로의 힘으로 열고 나가 바깥으로 통로를 내는 (relate) 다르지 않다. 나의 생활에 타인이 접속할  있는 통로를 만드는 일은 생활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회복 하는 것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음을 가리킨다. 생활을 돌보고 보살피는 이야기, 생활 속에 작은 희망을 조형해나가는 이야기가 풍성할수록  장소는 쉽게 휩쓸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무너진 생활을 일으켜세우는 과정을 이야기할 때 고립되어 있던 생활은 타인[사람], 현실[시간], 현장[장소] 접속하며 바깥으로, 다른 곳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회복은 좋았던  자리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과 다른 희망과 접속하여 다시 시작할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들은 다시 시작함에서 천재다. 누군가가 말했다. 회복기 환자처럼 살고 싶다고. 그들은 나를 회복기 환자 혹은 재활훈련을 받는 환자로 만든다. 치통을 앓는 자가 치통을 치료하기 위해서  닦는 법을 새로 배우는 것처럼, 위장병을 앓는 자가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식습관을 바꾸는 것처럼, 우리는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다시 배우고 익히고 습관을 고쳐야 한다.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자신에게 다시   기회를 줘보는 것이다.”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봄아필, 2013, 35.

 

 

 

회복하는 사람은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다시 시작할  있는 동력은 생활을 이야기라는 동아줄로 만들어 바깥으로 내어놓은 통로로부터 ()오는 것이다. 어렵게 내어놓은  생활의 동아줄,  한쪽 끝을 잡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없지만 누군가가  끝을 잡아 주었기에 팽팽해진 동아줄에 기대어 일어나 오늘도 걷는다. 어디에 도착할    없지만  누군가를 만나리라는 것은 틀림 없다.    

 

 

 

_[회복하는 글쓰기] Ⅱ. 삶을 가꾸는 생활 칼럼 쓰기 6강 안내글(2018.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