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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중심을 이동 하는 운동 : 생활, 모임, 글쓰기

by 종업원 2018. 6. 18.



선물 받은 강좌 포스터를 마치 마패라도 되는 양 당당하게 쥐고 오르막길을 오른다. 한참을 올라도 숨이 차지 않으면 체력이 올라와 있다는 것이어서, 숨이 차면 숨이 차는 대로 운동이 되고 있다는 신호이니 어느 쪽이어도 만족스럽다. 다용도실엔 여름 내내 마실 수 있을 정도의 물이 쟁여져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은 무거운 생수 묶음을 사들고 퇴근하고 싶다. 특별히 의도한 건 아니어도 2리터 생수 6개 묶음과 쌀 만큼은 인터넷 쇼핑이나 배달을 이용하지 않는다. 택배 기사님들이나 배달하시는 분들의 노동 강도를 더하지 말자는 생각도 있지만 무엇보다 필수품만큼은 내 손으로라는 생활 슬로건을 나도 모르고 읊조리게 되었던 터라 미련해보이거나 궁색해보일 것을 알면서도 낑낑거리며 오르막길을 오르곤 한다. 한달여만에 다시 재개한 [회복하는 글쓰기] 의 세 번째 강좌의 첫 시간을 마치고 퇴근하면서 슈퍼에 들러 생수 묶음을 샀다.

 

스물 살에도 하지 않았던 운동을 시작한지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무리하게 운동을 하다가 두 발목이 퉁퉁 부어 2주 간 운동을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 즈음임에도 아침에 일어나 첫발을 내딛는 순간 온몸이 쑤시고 결린다. 여전히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 건지, ‘나이 값을 제대로 치르는 것인지, 통과의례 같은 것인지 정확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운동하는 시간이 어느새 일상의 중심에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체육관에 가기 전에 할 수 있는 일과 체육관에 다녀온 뒤에 할 수 있는 일로 일과가 나뉘어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건강해지는 느낌과는 별도로 쓰지 않았던 몸의 여러 부분을 사용해보고 금새 차올랐던 숨이 꽤 긴 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는 상태로 바뀌고 있는 변화의 에너지가 주는 생동감이 흥미 있다. 연마하고 단련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는 의욕과 한계가 분명한 이라는 매개를 통해 무언가를 익히고 배운다는 정직한 느낌도 근래엔 드문 경험이어서 만족스럽다. 땀을 거의 흘리지 않는 체질로 살아왔는데, 운동을 시작하고부터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르고 운동을 할 때는 놀라울 정도도 많은 땀을 흘린다. 열심히 운동을 한 날엔 1kg이 넘게 빠질 때도 있다. 40대에 가까워지면서 세월의 중력에 몸 이곳저곳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왔는데 의지를 통해 기울어지고 있는 몸의 방향을 의도적으로 바로잡아가는 성취감도 적지 않다.

 

60일 남짓 지나고 있는 규칙적인 운동이 내 생활에서 무엇이 될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차츰 운동량과 시간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활을 돌보는 일에 몰두하다가도 어느 때에 이르면 집중해야 하는 일로 옮아가야 하는 것처럼 언제까지 운동을 중심으로 생활의 시간표를 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끔 수레바퀴처럼 반복만 하고 있거나 늪처럼 헤어날 수 없는 무력감에 휩싸이기도 하는 생활이라는 세계의 핵심은 중심 이동에 있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크고 작은 모임 또한 요체는 중심 이동이다. 모임을 이끌고 진행해야 하는 역할이 있을 뿐 누구라도, 어느 때라도 그 모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득하지만 끝까지 걸어가보고 싶은 내가 생각하는 모임의 희망이다. 다른 시공간을 살아내던 이들이 작은 약속 아래에 모여 보고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각자의 근육’(根堉)을 활용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 또한 사용하게 하는 운동과 닮아 있다. 여기서도 핵심은 역시 중심 이동이다. 그간 균형(balance)이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이를 기울어진 균형과 같은 어휘로 변주해왔지만 무언가에 집중하는 에너지가 꼭 기울어진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생활이라는 세계에 입회한 이후 강렬하지 않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는 물듦의 시간 속에서 도착한 배움은 무엇보다 지속’(끈기와 근기)할 수 있는 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었고 그건 매번 기울어지는 자아(변덕)에 대한 개입이자 비평의 방식으로 도착하고 했다. 

 

잠시나마 운동에 열중하면서 중심 이동의 중요성을 몸으로 배우는 시간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더 강하고 빠른 기술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집중 지속이라는 가치의 장소다. 이 느닷없는 장소에 머물며 생활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운동임을 알게 된다. 좌절과 기쁨으로 뒤섞여 있어 늘 갈피를 잡는 게 쉽지 않았던 숱한 모임들 또한 운동이었음을 함께 알겠다. 숨이 차지 않는다고 해서 운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해서, 근육이 붙지 않는다고 해서, 몸이 민첩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운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생활이라는 운동을 하는 사람과 생활이 없는 사람은 겉으로는 차이가 없어 보인다. 때때로생활의 면면은 자기 암시이거나 고백 같은 독백적인 구조를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몸으로 하는 운동에 집중하는 동안 알게 된다. ‘생활이야말로 필수 운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생활이라는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생활은 생활글처럼 실체가 없어보이고 들이는 품에 비해 결과라고 할만 한 것을 시원하게 내어놓는 경우가 거의 없다. 생활에 집중하면 생활 밖에 남지 않은 궁색한 상태가 되기 일쑤고 그렇다고 생활을 미루기만 하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일상 무너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한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법한 사람과의 관계가 남긴 상처투성이의 기억처럼 생활은 야생동물의 모습으로 내 삶에 무단으로 들어온 침입자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내쫓을 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반려이기도 하다. 생활이라는 야생동물과 동거할 수 있는 이는 길들여지지 않는 것들과 어울릴 수 있는 능력을 체화하는 측면이 있으며 익숙하지 않는 관계와 장소일지라도 나름의 역할과 자리를 곧잘 찾곤 한다. 산다는 건 살아간다는 순리와 살아낸다는 의지가 부대끼는 에너지의 흐름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부대낌 속에서 발현되는 어울림의 능력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 본인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기에 생활(운동)력에 대한 이야기 또한 드물다. 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집중적인 운동은 생활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일상적인 능력을 가시화 할 수 있는 좋은 매개이기도 하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떻게든 지속하고자 하는 무용한 행위들. 생활 노동과 어울림(모임)의 노동처럼 오늘 쓰는 문장 또한 당장엔 볼품없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보인다. 그렇게 거처를 잃고 방황하다 바스러지는 문장일지라도 신기루는 아니다. 모래처럼 가라앉는다 해도, 먼지처럼 흩날린다 해도 제 힘으로 써낸 모든 문장은 어딘가에 내려앉기 마련이다. 한 잔의 물을 마실 때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잔에 가득 채워진 물 한 잔 만큼 충만하고 필수적인 것도 없다. 저마다의 생활 속엔 양손에 생수 묶음을 쥐고 올랐던 오르막길의 이력이 있다. 생활이, 모임이, 글쓰기가 보이지 않는 은총처럼 삶에 필수적인 것을 예비해두는 노동이자 운동이라는 진실의 무게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회복하는 글쓰] 3. 단편 영화와 함께 비평 쓰기 1강 후기(2018. 6. 14_동광동 자연과학 책방 '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