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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말의 영점, 몸의 영점

by 종업원 2018. 12. 2.

2018. 11. 27


유난히 길었던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퇴근한 시간이 10시 반.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구나라는 안도감보다 종일 뭔가 콱 막혀 있는 듯한 갑갑함을 견디는 게 쉽지 않다. 오늘은 종일 수업이 있는 날이고 그건 종일 노심초사 해야 한다는 것. 좀처럼 듣지 않고 끝내 말하지 않는 학생들을 두루 살피며 그럼에도 해야 할 말과 더는 할 수 없는 말들 사이를 줄타기 하듯, 어쩌면 줄다리기를 하듯 용을 쓰다가 탈출하는 마음으로 퇴근한 탓일까.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지만 오늘의 경색만큼은 털어내거나 뚫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말차 한잔을 마신 뒤 달릴 채비를 하고 나선다. 


가만 더듬어보면 말의 문제이지 않았던가. 매주 강의실은 말이 죽어나가는 것을 묵묵히 목격해야 하는 참담한 현장이지 않는가. 엇나가는 말들, 지면에 내려앉지 못하고 부유하는 말들,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을 맴도는 말들, 그럴듯하기만 한 말들, 체면치레의 말들, 손해보지 않기 위해 하는 말들, 개입하거나 비평하지 못해 구슬려야 하는 말들, 처음부터 굽어 있는 말들, 그렇게 온종일 굽실거리는 말들. 너도 나도 말을 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 말들이 단박에 회복되진 않겠지만 ‘말의 영점(零點)’이라도 잡기 위해 애를 써야 하지 않을까. 옳은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하고 있는 ‘말의 탄착군’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지금 발화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고 책임을 질 수 있을 텐데, 대개는 자신의 말이 칭찬이나 동의 받지 못하는 걸 견뎌내질 못하고 재서술을 통해 그 말을 다시금 건낼 때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면 내가 건낸 것이 말이 아닌 침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건 각자의 말의 영점을 잡아가는 과정이겠다. 그건 상호작용 속에서만 가늠할 수 있는 것이어서 홀로 하기 어렵다. 묵히기만 하여 꽉 막혀버린 건 말만이 아니다. 몸의 영점이라도 잡아볼 요량으로 달린다. 지도를 살펴보니 다대포 해수욕장까지 달리면 4.5km다. 보행자가 거의 없는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간만의 러닝이어서 금새 숨이 차지만 속도를 조금만 조절하면 견딜만해진다는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다. 2km 구간을 지나면서 발목과 어깨에 분명한 자극이 느껴져 그 부위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집중하면서 달려본다. 달리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 ‘부상’과 ‘단련’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차이정도 밖에 나지 않는다는 사실. 부상을 너무 두려워하면 단련이 되지 않고 단련에 탐닉하는 순간 부상을 당한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가쁜 호흡으로 달리는 동안 몸은 공포와 매혹의 교차로다. 처음 달리는 길이어서 어느 정도 긴장했지만 가쁘게 차오르는 숨이 꽤나 상쾌하다.


돌아가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천천히 걸어서 귀가할 요량이었는데, 땀이 식으면 체온이 금새 내려가 자칫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 다시 달린다. 예정에 없던 과한 러닝을 하면서 느끼는 것 하나. 대개는 돌아가는 길이 더 멀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금새 도착해버렸다는 것. 걱정 없이 달리는 동안 ‘영점’이란 옳은 방향 따위가 아니라 ‘충분히 집중해보는 경험을 익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말의 영점을 잡아가는 일 또한 타인과 집중해서 대화를 하는 경험 속에서만 가능하다. 찌부둥하고 시큰둥한 강의실의 표정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이곳에 집중의 에너지가 없다는 것. ‘충분히 집중해보는 경험’의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겨우 도착한 길어귀에 멈춰 서서 코피처럼 땀을 쏟으며 가쁘게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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