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믿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 이는 진정성의 부재라기보다는 진정성의 증거였다.”
―레슬리 제이미슨, 『리커버링』
1974년 11월 말,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초크는 젊은 영화인들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평론가 로테 아이스너가 위중하다는 전화를 받는다. ‘아직은 그녀의 죽음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독일 뮌헨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걸어가면 그녀가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고 떠난 무모해 보이는 여행기, 『얼음 속을 걷다』(베르너 헤어초크, 안상원 옮김, 밤의책, 2021)엔 혹독한 추위와 질척거리고 험난한 시골길, 어둡고 늙은 지방 사람들의 표정만이 이어진다.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기록했던 탓에 걷기로 결심한 것을 후회하거나 자주 수치심과 자괴감에 휩싸이고 때론 망상에 가까운 상상력이 느닷없이 펼치거나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고난 끝에 맞이하는 성스러운 순간이나 누군가를 염려하는 절절한 마음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이 기이한 여행기를 읽는 동안 밑줄을 그어둘 문장을 찾진 못했지만 2020년 2월의 어느 오후, 어머니가 입원해 있던 병원까지 달려서 갔던 날을 떠올렸다. 불행한 사고로 두 다리가 바스러져 거동을 할 수 없었던 어머니가 계시는 곳으로 가기 위해 강변도로를 따라 장림에서 사상까지 달렸다. 고요했던 낙동강 위에 떠 있던 오리 무리를 향해 인사를 하고 안부가 궁금하던 이에게 잘 지내냐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기적 같은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빨리 지치진 않아야겠다는 작은 다짐 정도는 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해 4월엔 망미동에 있는 한 책방까지 달렸다. 한 친구에게 전할 선물과 책방에 전할 몇 권의 책을 가방에 넣어 괴정, 대신동, 부산역, 좌천동, 문현동, 남천동을 지나 망미동까지 달렸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달려서 도착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쉼터였다. 자가동력기처럼 구르고 있을 때만 잠깐 점멸하는 작은 등불에 의지해 그 시기를 지나갔던 것 같기도 하다.
아플 땐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다가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느낌이 들면 그제서야 호소가 시작된다. 그러니 ‘아프다’는 신호엔 안부의 인사를 먼저 건네야 한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홀로 재활 운동을 하는 동안 어머니가 감지했을 ‘나아지는 기미’의 맥박은 얼마나 여리고 희미한 것이었을까. 그 기미는 아무도 모른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린 속도로 나아지는 동안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 또한, 아무도 모른다. 매일매일, 매순간 감지하지 않으면 회복의 기미는 흔적도 없이 휘발되어 사라진다. 회복한다는 건 무거운 수레를 끌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길을 오르는 일이다. 그건 한 순간에 치명적인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니 큰 용기가 필요하다. 간절히 기다리고 애써서 행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회복에 대한 희망은 시한폭탄의 얼굴이 되어 우리를 돌아본다. 째깍째깍 회복의 더딘 시간과 함께 째깍째깍 시한폭탄의 시간도 함께 흐른다. 회복하는 사람들은 아직 깨지지 않은 알을 품고 있다. 언제 부화할지 알 수 없지만 품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는 순간 쉽게 깨지고 만다. 아무도 모르는 ‘두 개’의 시간이 멈추지 않길, 각자가 품고 있는 알들이 깨지지 않길.
또따또가 4기 입주작가 단체전_Busan. 2021.9.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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