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다니던 시절, 내겐 유별난 ‘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책의 서문을 섭렵하는 것이었다. 선배와 선생 없이 오래된 서가를 헤집고 다니며 수많은 책들의 서문을 읽느라 하루를 다 소진하곤 했다. 수줍은 고백으로 채워진 서문은 알 수 없는 문장들로 빼곡한 어려운 책을 친근하게 만들어주었고 비장어린 선언문과 같은 서문을 읽으면 마치 공동 저자라도 되는 냥 함께 달뜨곤 했던 것이다. 책의 서문을 읽으며 마음과 몸이 동뜨는 것은 필시 예비 문사의 허영에 가까운 것이었을 테지만 새로운 세계, 혹은 새로운 말들과의 첫 만남이 주는 설렘과 기쁨만큼은 숨길 수 없는 것! ‘세계의 본문’을 예감하고 직감할 수 있는 교량이기도 했던, 그 시절 읽었던 책의 서문들이야말로 내게 ‘문학적인 것’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수년간 습관적으로 해왔던 일상적인 서문 읽기는 인문학 일반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 습득으로 이어졌고 그것의 연쇄가 예상치 못한 지적 그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뜻하지 않게 만들어진 그 그물의 비체계성이나 성긴 그물코의 여백이야 두말할 것도 없겠지만 한편으론 그 ‘의도하지 않음’이 낚아채는 것들 또한 적지 않았다는 것쯤은 슬며시 자랑해도 그리 흉은 아닐 것이다. 요즘이야 간편하게 인터넷 검색만하면 웬만한 정보는 금세 손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만 불과 10여년전만 하더라도 몸을 움직여 찾지 않는 한 정보를 획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서문 읽기라는 ‘유별난’ 취미는 이렇다 할 지식도 인맥도 자본도 가지지 못한 도시빈민 출신의 대학초년생이 지적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즈음 내가 헌책방을 전전하기 시작한 것 또한 지적 갈급을 풀기위한 자구책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서문 읽기에 애를 썼던 것처럼 헌책방 순례 또한 전부를 가질 수는 없지만 작지만 유일한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외현화 된 것이었을 터. 참으로 부지런히 보수동 헌책방을 왕래한 결과 보수동 헌책방의 지형도를 나름의 방식으로 그릴 수 있는 형편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각 서점들의 특징과 도서의 분류 체계 및 소장 위치의 파악에서부터 새로운 책이 들어오는 주기나 가격 흥정하는 법까지 두루 익히게 되니 보수동 헌책방 골목이 아직 가져보지 못한 서재쯤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궁핍한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많은 책들을 사모으기도 했지만 책을 싼 값에 살 수 있다는 이점뿐 아니라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주는 아늑(득)함과 미처 분류되지 않은 책더미를 마른 침을 묻혀 헤집고 다니며 나름의 분류체계를 구축해가는 ‘오만한 기쁨’이 주는 쾌감 또한 작지 않은 것이었다. 퀴퀴한 종이 곰팡이를 흡입하다가 소장하고 싶었던 책을 찾거나 절판된 귀한 책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헌책방에서 이루어졌던 무엇보다 매력적인 만남은 책속에 남아 있는 메모들의 발견에 있다고 하겠다. 나보다 먼저 그 책을 읽었던 이들이 남긴 메모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적인 정보를 우연히 훔쳐보는 기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나의 위치’를 읽어내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선택한 한권의 책에 남겨진 그 메모는 과거의 내가 쓴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고 그것은 ‘나는 어떻게 해서 여기로 오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동반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헌책방에서 열심을 부리며 어지럽게 널려 있는 책들을 분류하고 배열해갈 때 그곳은 내 ‘책장’ 같은 곳이었고 동시에 도서관에서 읽힌 정보들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펼쳐볼 수 있는 ‘현장’과 같은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헌책방으로 분주히 오가던 발길이 뜸해진 것도 벌써 몇 년이 지난 듯하다. 오랜만에 다시 헌책방을 찾으니 그동안 분주하게 오고 갔던 나의 삶의 패턴과 반경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그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책의 환경과 그 패턴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일 터. 새책들이 물밀듯이 나오고 있고 그만큼 정보 회전력도 빨라지고 있다. 그와 연동하여 각종 할인율도 높고 이제는 헌책 또한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형편이니 헌책방의 매력이 이전처럼 크지 않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물리적인 변화보다 책을 둘러싸고 있는 지형도의 형질 변화에 더 집중하고 싶다. 몸을 움직여 정보를 수집하고 더디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체계를 구축해가던 방식에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검색 엔진)를 기반으로 재빠르게 업데이트 하고, 더 많은 정보를 통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의 변화. 좀 더 정밀한 논증과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나는 이 변화를 ‘키드(kid)에서 오타쿠(おたく)로의 이행’이라고 명명해두고 싶다. 1990년대에 마니아(mania)로 통칭되는 수많은 ‘키드’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네마 키드들은 보급형 8mm 캠코더로 단편 영화를 찍었고 클럽에서는 펑크나 얼터너티브 록음악 연주가 끊이지 않았다. 도서관과 헌책방을 전전한 나 또한 그런 ‘키드’의 변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시대 변화에 둔감한 끝물의 문청(문학청년)말이다.
단골로 다녔던 보수동의 ‘우리글방’ 사장님이 지병으로 시골에서 요양 중이라는 소식은 이미 오래전에 들었 건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듯하다. ‘새로운 헌책들’이 들어(돌아)오지 않으니 곳곳에 숨어 있는 책 찾는 재미가 덜할 수밖에 없다. 옛날 ‘우리글방’ 자리 맞은 편의 ‘대우서점’이 공간 확장을 해 새로 자리한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헌책방에 오면 한번쯤은 들어본 책이나 이미 잘 알고 있는 책들만이 눈에 들어왔는데, 오랜만에 찾은 이번은 이상하리만큼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책들이 눈에 들어온다. 생소한 책들을 펼쳐보며 미처 내가 알지 못한 정보들과 저자들의 이력에 눈이 환해진다. 그러나 그 뜻밖의 기쁨 앞에서 몸을 움직여 습득한 한정된 정보와 지식을 소중히 생각하며 애를 써서 찾고 분류하고 재조합하던 ‘한 시절’이, 어떤 ‘키즈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슬프게 직감할 수 있었다.
-<백년어> 8호에 기고
오랜만에 들른 보수동 헌책방에서 뜻하지 않은 책을 고르면서 잡아챈 상념들을 풀어써본 글이다. 이제 내게, 보수동은 책을 보고, 만지고, 만나고, 구매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 근처에서 뜻하지 않게 남은 몇 시간을 하릴없이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 짧은 글은 일전에 올렸던 <취향의 몰락>을 쓸 때의 고민을 연장한 것이기도 하다. 취향의 니힐리즘을 '록키드'와 '시네마키드', '문청(문학청년)'의 종언과 함께 연관시켜 고민해보고자 한 것이다. 가령, 영화 <스쿨 오브 락>에서 잭 블랙이 사립초등 학교 학생들에게 칠판이 가득 매워질 정도로 열심히 가르쳤던 '록의 계보'와 같은 것들이 '잊혀진 역사'나 '세대차이'와 같은 것으로 맥락화되는 것이라던가, 오늘날의 문학이나 영화나 음악들을 소비하는 데 있어서는 '계보'와 같은 것들이 무용해져버린 상황, 다시 말해 어떤 것을 즐기기 위해, 더 좋아하기 위해 그 뿌리를 찾아가거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고를 찾아보기 힘든 지금의 정황을 '키드 세대'의 종언으로 설명해보고 싶었다.
필이 꽂혀 비슷한 글/영화/음악들을 찾아보는 것과 '계보'를 만드는 것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아주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나는 거기서 '총체성의 붕괴'와 같은 기미를 읽어내게 되는데, 오늘날의 대중문화와 그것을 소비하는 대상의 맥락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특징으로 자주 언급되는 '오타쿠(적인 것)'이 얼핏 <록키드/시네마키드/문청>과 비슷한 층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자가 맹목적인 정보 수집을 통한 새로운 정보의 재생산에 있다면 후자는 '총체성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성긴 생각의 줄기를 늘어놓게 된다. 요즈음 내 관심은 '파국', '재난', '종언'이라는 규정적인 단어들에 집중되곤 하는데, 분명 어떤 상실감의 정서를 밑바탕에 둔 이 단어들의 주변을 배회하는 '의도' 또한 애를 써서 규명해야 하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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