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와 예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별미’를 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막상 ‘별종’을 만나게 되면 태도가 돌변하곤 한다. 그 돌변의 자리가 가리키는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별미’란 내 입맛(욕망)을 자극하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별종’이란 이해하거나 파악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장악할 수 없기에 매번 존재 그 자체로 내게 육박해 들어오는 어떤 위협으로 감지된다. 하여, ‘별종’들은 ‘보습 대일 땅이 없고’ 스스로를 증명할 상징질서도 희박하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별종’들은 ‘별미’라는 장애물, 더 정확하게 말해 ‘작은 차이들의 나르시시즘’을 원리로 하는 자본제적 (가치) 체계가 구축해 놓은 강력한 질서로 인해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마저도 박탈당하기 일쑤다.
<하나의 장르, 바로 그 한 사람>이라는 기획의 필요성은 ‘아비도 없고 아비가 될 수도 없는 이’들의 작업과 만날 수 있는 방식들의 고안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중문화 예술계와 인문사회계의 ‘별종’들, 다행스럽게도 아직 죽지 않고 더운 숨을 내쉬며 살아 있는 그 ‘별종’들의 삶과 작업을 통해 세속의 삶을 거스르거나 어긋낼 수 있는 묘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 묘안이란 달리 말해, ‘새로운 의욕’을 촉발할 수 있는 에너지일 텐데 어떤 존재가 지상에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장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열패감과 열등감으로 점철되어 있는 우리들의 삶 속에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내장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발견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존재-장르’를 통해 ‘별미’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의 안목(眼目)에 ‘새로운 의욕’이 싹틀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첫 번째, 인디뮤지션 김일두를 만나다.
‘부산 인디씬’에서 펑크를 기반으로 10년 이상을 활동하고 있는 ‘기이한’ 뮤지션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천재 뮤지션 김일두’. 그 이름의 생소함은 둘째로 치더라도 ‘부산 인디씬’이라는 용어부터 이제 생소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슬픈 마음’으로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그러한 정황 속에서도 밴드 ‘서스펜스’를 시작으로 ‘마마썬’, ‘난봉꾼들’, ‘지니어스’로 이어져오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천재’ 뮤지션 김일두가 건너온 10년이라는 시간의 의미에 대해 탐문해본다. 그의 이름 뒤에 ‘인디뮤지션’이나 ‘로컬씬에서 기념비적인 인물’이라거나 혹은 ‘자립형 음악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것은 얼핏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부산이라는 지역을 거점으로 10년 이상 음악 활동을 해오고 있는 그 사실이야말로 지금껏 알지 못했던 ‘장르’의 모습을 얼핏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천재 뮤지션’이라 칭하는 그 호명 방식은 단순한 호기나 유머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이라는 표현은 도리 없음, 방법이 없음을 뜻하는 것일 텐데 그 불가피함이 ‘천재’를 수식할 때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천재’라는 과장된 용법과 ‘어쩔 수 없는’이라는 불가항력적인 규정의 어색한 조합에서 부산이라는 변방에서 10년 이상 펑크 음악을 해온 한 존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정서’에 다가갈 수 있 경로가 열리는 듯도 하다. 따라서 이 인터뷰는 김일두를 수식하고 호명하기 위한 ‘정보’를 기록하기보다 외려 그를 수식하고 호명할 때 삭제되어버리는 일상과 소소한 감정의 편린들을 기록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김일두 음악의 요체는 ‘인디뮤지션’이나 ‘펑크’라는 장르 규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일 직장 생활’을 할 때만 ‘주말 음악활동’의 여건이 마련되는 정황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서와 감정의 편린에 있다고 하겠다.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그의 정서를 탐문하는 동안 부산이라는 도시가 겨우 ‘허락’ 하는 한 평 남짓한 ‘삶의 반경’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읊조리듯, 야유하듯, 절규하는 듯 부르는 그의 노래,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는 가사 속에 삶의 비애와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패배의 정조를 감지할 수 있다. 그 정서는 아마 10년 이상 부산이라는 변방에서 음악을 해온 ‘어떤’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인터뷰가 김일두라는 뮤지션의 의미를 짚어주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김일두의 소소한 일상과 감정의 편린을 쫒아가는 탓에 임팩트도 없고 담고 있는 정보도 한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으면 한 개인의 정서뿐 아니라 외려 그 정서가 출현하는 자리, 바꿔 말해 부산이라는 도시 속에서 만들어지는 문화판의 단면을 얼핏 엿볼 수 있게 된다. 잡담처럼 보이는 이 인터뷰가 ‘잡담이라는 형식’ 속에서만 캐낼 수 있는 중요한 정서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굳이’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두 번에 걸쳐 연재될 이 인터뷰의 첫 회는 음악활동을 둘러싼 정황과 그 속에서 갈등하는 부산 시민이면서 뮤지션인 김일두의 정서와 고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안 좋은 것은 대번에 안다”라는 김일두의 언급에 부산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집약되어 있는 듯하다. 일견 단순해보이고 보수적인 측면 또한 엿볼 수 있는 그의 삶과 음악적 경로가 실은 안 좋은 것들을 힘들게 피해왔던 경로에 다름 아님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인터뷰라는 것을 했다. 지금은 '일두형'이라고 부르지만 뮤지션 김일두와의 인연은 프로젝트 팀에서 진행했던 <로컬쳐 서평회> 준비를 위해 몇 차례 만난 것에서 시작되었다. 용두산공원 아래 <계림>에서 우리는 멋쩍게 닭볶음탕을 함께 먹었고 내 친구 진희가 사온 순대와 함께 병맥주를 여러 병 마셨다. 지치고 우울한 어느 날 아침, 나는 '롹켄롤'이라는 주문을 벼락처럼 떠올렸는데, 김일두 또한 그런 벼락 같이 떠올라 내게 에너지를 전해주는 뜻밖의 '뽀나스'(부산일보 2010. 8.7일자 <일기>코너에 김건우 씨가 언급하고 있는 '뽀나스'는 뮤지션 김일두의 어휘다) 같은 사람이다. 대학 다닐 때는 길거리 뮤지션에서 스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과 친분을 맺어왔는데, 대학원을 거쳐 연구소의 연구원이 되면서 관계의 반경이 일정한 방식으로 구획되어버렸다. 지금 내 관계 체계에서 만날 수 없는 이를 용두산 공원 아래에서 만났으니 어쩐지 '뽀나스'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볼 때마다 반갑다.
부산이라는 변방에서 10년 이상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는 '표지'만으로는 뮤지션 김일두를 설명할 수 없다. 뮤지션 김일두에 관해서는 그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랜 시간 음악활동을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잘'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와 대화를 나누거나 때때로 문자를 주고 받으면서 '지속'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잘' 해야 한다는 것임을 문득문득 자각하게 된다. 어쩌면 뮤지션 김일두의 알짬은 '어쩔 수 없는 천재'라는 독특한 자기 명명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스스로를 희화화 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내내 당당하다. 얼핏 투박한 듯한 그의 말투야말로 그가 만드는 음악의 속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지독한 생활' 속에서 지치거나 늘어지기보다 탄력적으로 길어올리고 날렵하게 잡아채는 섬세한 어휘가 가지는 놀라운 에너지는 그와 대화를 해본 이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것이다.
* 내 친구 진희('mora'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가 문화잡지 <보일라>에 연재하고 있는 <sinterview>는 이 인터뷰를 준비하는 데 보이지 않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가 행한 인터뷰에는 상대를 규정하거나 평가하기보다 성실하고 꼼꼼하게 준비하는 태도가 곳곳에 뭍어 있다 . 관련 내용은 http://spacechon.egloos.com 에서 조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음악가 '한받'에 관한 글은 반드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할 만큼 '좋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업과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한받 음악에 관해서 나 또한 짧은 글 한편을 쓴 적이 있는데(숟가락 하나로 만든 샘), '한받'도 그렇고 '이상은'도 그렇고 모두 내 친구 진희로부터 소개 받은 뮤지션들이다. 뮤지션 김일두 또한 진희가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인터뷰에는 내 친구 진희의 이름 또한 추가되어야만 한다.
'던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재의 조건 : 공명(共鳴)―공동(共同)―공생(共生) (3) | 2011.11.16 |
---|---|
하나의 장르, 바로 그 한 사람(2) (0) | 2011.11.12 |
어떤 ‘Kid’의 종언―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의 슬픈 기쁨 (2) | 2011.09.20 |
생존의 비용 : 지우는 글쓰기와 장르 문법 (0) | 2011.08.27 |
존재론-비평론-공동체론이라는 보로메오 고리―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한겨레출판사, 2011) (2) | 2011.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