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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질 자신_도둑러닝(5)

by 종업원 2023. 5. 4.

2023. 5. 2

남성여고 주자장 가는 길에 마주친 뒤집어진 파라솔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

이세돌의 '밈'으로 알려진 이 말을  달리기에 빗대어 누군가에게 했던 적이 있다. 1km를 5분대로 뛸 수 '없는' 강박과 다급함을 토로한 것이었지만 속도와 기록에 대한 즐거운 비명에 가까운 너스레이기도 했다. 장림에서 다대포를 거쳐 장림 포구를 돌아 장림 시장 둘레를 달리면 10km가 조금 넘었다. 일주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달리며, '평생 달리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순간도 있었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복싱을 더 잘 하기 위해서, 링위에서 지치지 않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였지만 '먼 거리를 온힘을 다해 달려서 다다른다'는 단순함과 명료함이 좋았다. 달리는 동안 거의 어김없이 한두 가지 생각을 떠올리거나 품게 되는 것 또한 좋았다. 달리는 동안 흐르는 전류가 있었고, 달리는 동안 켜지는 스위치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쫓기는 마음'을 감춰보거나 짐짓 모르는 척 하고 싶어서 그리도 열심히 달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린 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면 쌓여 있던 걱정거리를 잠시나마 잊게 되었고, 날카롭던 마음도 잠잠해졌다. 

제작년부터 무릎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해서 달리는 횟수와 거리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달리는 속도도 낮췄지만 달리지 않을수록 무릎은 더 안 좋아졌다. 두어달에 한 번 달리고 두서너달 쉬기를 반복하다가 달리기와 헤어질 날이 멀지 않았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난 3월 12일 달리기를 기억해두자 한다. 이날은 처음으로 7분대로 5km를 달린 날인데, 기록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봄기운을 만끽하며 나들이 나온 사람처럼 거닐며 달렸다.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고, 다리 힘도 빠지지 않았으며, 달리는 내내 쾌적하고 즐거웠다. 이 좋은 걸 왜 그만둬! 무릎에 큰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즐겁게 달리는 방법을 찾게 된 것만 같다. 5월 첫째날, 여느때와 다름없이 장림에서 다대포로 가는 길을 달리며 '질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든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귀에 대고 외치는 세상에서 지는 건 특별한 게 없는 일이지만 '질 자신'을 가진다는 건 다른 문제다. '질 자신'이 없기(현명하게 지는 걸 배우지 못했기)에 이기려고 기를 쓰다 상처를 주고 상처 받는다. 모두가 부상당한다. '질 자신'이 있어야 만나고 배우고 이어갈 수 있다는 걸 달리며 되뇌었다. 그리고 조금 더 천천히 달려야겠다 생각하며 조금 더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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