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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빈 채로 좋아하다

by 종업원 2023. 10. 23.

2023. 10. 21
 

작업실에서 서성이다가 마침내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안달이나서 곧장 불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냇물처럼, 따뜻한 봄볕이나 가을날 부는 바람처럼 느긋하게 내려앉는 좋아함을 느끼며 조금 더 서성였다. 

'좋아한다'는 말은 내게 금기어에 가까운데, 때때로 사람들과 어울릴 때 나도 모르게 그 마음을 내비치는 경우도 있지만 깊게 품으려 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이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만큼이나 좋아하는 (내) 마음에 깊이 빠지기 쉽기 때문에 단박에 좋다 여기는 것은 거듭 의심하거나 본능적으로 그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곤 했다. 서서히 이끌리는 것에 대해선 일부러 흐릿하게 하거나 곁눈질로만 보려 애썼다. 

충분히 좋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좋아하는 것 앞에서 뒷걸음질 쳐온 습관이 마음을 메마르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매번 대상이 다를 테니 좋아함 또한 새롭게 샘솟는 마음이라 할 수 있겠지만 마음놓고 충분히 좋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주저함이 몸과 마음에 배어 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과 주저함 때문에  여전히 혀끝 아래에 늘 좋아함을 머금고 있다는 것도 알겠다.

이 작업실에 여러 사람들이 오고 갔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돌보았다. 종종 사람을 만나는 장소로, 작은 강좌와 모임을 여는 곳으로 여기며 살뜰히 챙겨왔지만 이상하리만치 이곳이 늘 비어 있다고 느낀다. 북적북적한 걸 바라서가 아니라 아마도 홀로 열고 닫는 것에 대한 쓸쓸함과 피로감 때문일 것이다. 내가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모임, 그래서 열어야 한다는 부담과 왜 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늘 짊어지고, 어렵게 열면서도 혹여나 누구도 오지 않으면 어쩌나라는 걱정을 줄줄이 매달고, 무사히 모임을 열고 난 후엔 누구보다 앞질러 다음엔 또 어떻게 열어야 할까라는 막막함이 도착해 있다. 

물 한 모금이, 바람 한 점이, 담요 한 장이, 말 한 마디가 때론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구하는 것처럼 나는 늘 한 사람을 기다린다. 이제는 그 어떤 간절함 없이 그저 텅 빈 마음으로 기다린다. 좋아함을 혀끝 아래에 머금고.

이 작업실이 빈 곳이 아니라 비워둔 자리라는 것 또한 알겠다. 이것저것들로 채워 허전함을 달래기보다 텅 빈 채로 두는 것, 그렇게 텅 빈 자리를 돌봐온 이력이 이곳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함께 쌓여 있다. 이 빈 자리는 내가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리이기도 하다. 지금 이 빈 자리엔 아무도 없지만, 모두 있다. 늘 내가 빠진 모임 사진과 달리 이 빈 자리엔 나도 함께 있다. 빈 자리엔 사람들로, 이야기로 가득 차 있구나! 이렇게 (숨겨) 말해 온 게 아닐까 싶다. 빈 채로 좋아한다. 텅 빈 자리를 좋아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내내 빈 자리를 마련해둔 마음을 어루만지듯 손 내밀며.
 

2023년 1월 11일 오후 4시 중앙동 스튜디오 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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