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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4월 일기

by 종업원 2023. 4. 27.

2023. 4. 17
망한 사람으로부터 배움_비온후책방 강연을 마치고 최종규 작가님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늘 그렇듯 경이로운 이야기가 많았지만 칫솔질 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신 것이 유독 선명하게 남았다. 이틀날부터 자연스레 최종규 작가님이 알려준 방식으로 칫솔질을 하며 최종규 작가님을 생각했다. 작가님 치아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칫솔질 이야기에 더 믿음이 갔다. 그저 망하기만 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드물게, 망하면서 배울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망한 이야기를 ‘고백’하지만 어떤 이는 망하면서 알게 된 것을 슬기롭게 건넨다. 망한 세상으로부터 배울 게 있고 망한 생활 속에서도 캐낼 것이 있다. 슬기롭게 망할 수야 없겠지만 망한 뒤에 한줌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슬기로움을 건져낼 수도 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머금은 옅은 미소, 그 아래에 쌓인 오랜 분노와 슬픔이 드리운 희미한 그림자. 그런 얼굴을 가진 이가 망함 속에서 건져올린 슬기로움을 내게 건네주었던 밤.   

  
2023. 4. 20
안녕하세요. 저는..._중간고사 문제지를 받으러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 줄곧 '타대'에서만 강의한 탓에 학과 사무실은 친하지 않은 사람 집에 방문하는 느낌이어서 갈 때마다 무례를 범하는 것만 같아 가급적이면 가지 않으려고 하지만, 문제지를 챙겨야 하니 오늘은 별 수가 없었다. 티나지 않게 어깨와 허리를 말아넣고 문제지를 기다리고 있는데 장학조교로 보이는 분이 대뜸 인사를 했다. 4년전에 강의를 들었다면서, 그때 강의가 인상 깊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다고... 지금은 대학원생이 되었는데, 대학원 진학에 1학년 때 들었던 강의 영향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 영광입니다."라고 말을 한 뒤 도망치듯 학과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어떤 강의를 들었던 분인지는 묻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인사 드리고 싶었다'는 말이 종일 나를 따라 다녔다. 우연히 만나 서로를 바라보며 애써 인사를 건네는 것, 그거면 족하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다시 만납시다'라고 마음으로 화답했다.  

 
2023. 4. 22
살림길 잇기_이틀이나 삼일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몰아서 자는 날이 늘어간다. 불면증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틀이나 삼일은 쓰지 못하고 하루에 몰아서 쓰려니 더 써지지 않는 날이 계속 쌓이는 형편을 돌아본다면 내 생활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고약한 습관이 잠에 들러붙은 거란 생각이 든다. 다른 한쪽엔 제한된 음식만 먹는 체질식을 하며 그 어떤 군것질을 하지 않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일터로 가거나 작업실에 가는 날엔 도시락을 싼다. 자주 마트에도 들르지만 체질식과 관련 없는 식료품은 사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떠올려보면 유별난 이 결기가 용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체질식을 하며 도시락을 싸는 생활 방식을 잠과 이을 수 있는 살림길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살림길이란 별스런 깨침으로 발견하는 것이라기보단 생활 속에서 작은 오솔길을 찾아서 걷는 일일 따름일테니 생활을 펼치고, 누비며, 걷고 또 걷는 수밖에 없다.


2023. 4. 26
속도와 기분_작년 10월부터 운전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자가용을 가지는 삶만큼은 피하겠다 굳게 마음 먹었지만 늙고 아픈 일이 잦아진 부모님을 병원까지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지인 손 때가 묻은 중고차를 넘겨 받은지 6개월이 지나고 있다. 운전을 하며 곰곰 되새기는 순간들을 속으로만 적바림 하던 중에 ‘기분’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날이 잦아 며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 하루살이가 대체로 그러하지만 좁은 자동차 안에서 운전을 하는 동안 오롯이 홀로 있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 와중에 무작위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기분이 좋다’고 느낄 때가 몇 차례 있었는데, 새삼 그간 참으로 ‘기분’을 멀리 하며 살았구나 싶은 것이다. 아마도 기분을 변덕과 같은 것쯤으로 생각해온 거 같다. 기분 따위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잘 쉬거나, 잘 놀거나, 잘 먹는 방법도, 기억도 없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운전을 하며 여기저기를 들러 여러 일을 하는 와중에 ‘기분’이라는 게 하루를 버틸 수 있게 돕는 작은 기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기분이 생활에 내려 않거나 희미한 자국을 남기고 있음을 알겠다. 그래서 운전을 하면서 느끼는 ‘기분’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가만히 살펴보았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듣는 음악 속엔 ‘긴장’과 ‘집중’이라는 요소가 있다. 이어폰으로 듣는 것보다 음질은 못하지만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음악이 온몸을 감쌀 때 온전히 집중해서 듣는 상태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도감이 아니라 한 순간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팽팽함 긴장감에 있다.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는동안 느끼는 ‘기분’을 쪼개어서 생각해보면 온전히 집중해서 음악을 듣는 것과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긴장이 깍지를 끼고 있는 셈이다. 느슨함이 아니라 집중에서, 여유가 아니라 긴장을 통해서 나는 기쁨을 찾고 느낀다는 것을 새삼 다시 알겠다.

낙동강 강변대로를 자동차로 달리면서 이대로 계속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명지를 지나 용원, 용원을 지나 진해, 진해를 지나 낯선 곳까지. 6개월간 운전을 하며 늘 가야 하는 곳과 갔던 곳만 다녔다. 기분은 무엇보다 생생하게 나를 사로잡지만 그건 손으로 만질 수 없고, 그렇기에 나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반짝이며 요동치는 기분을 내 것이 아닌 것마냥 미련 없이 내려두고 변함 없이 장림으로(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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