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가진 물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치카와 사오가 쓴 <헌치백>(양윤옥 옮김, 허블, 2023)에서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37쪽)는 대목과 이어진 내용을 읽으며 뜨끔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저 또한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밑줄을 쳤지만 ‘한결같이’ 이런 구절만 눈여겨보구나 싶은 생각도 들어 한구석이 찜찜하기도 했습니다. 생각지 못한 대목을 짚으며 다른 길을 낸다는 점에서 <헌치백>에 더 귀기울이고 싶지만 그게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정보값을 늘려가는 비장애인들의 ‘올바른(PC)’ 방식을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더군요. 이 또한 문제될 게 없지만 가끔 이런 책을 접할 때만 잠시 놀라며 장애인에 대한 ‘생생한’ 정보값을 늘려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도돌이표가 못마땅했습니다.
일본에서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해 1970년대 초반 주로 활동한 뇌성마비 장애인 단체인 ‘푸른 잔디회(全国青い芝生の会)’는 승차 거부에 맞서 버스를 점거하고, 목욕탕 입장을 거부당하자 목욕탕을 점거하기도 하며, 횡단보도를 기어가 도로 위에 시를 쓰고 나체 시위를 벌이곤 했습니다. 이들은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단 대부분을 ‘부정’하고 ‘거부’했는데, 그 강령을 옮겨옵니다. (57회 ‘문학의 곳간’_2019년 4월 28일_에서 함께 읽었던 김원영 작가가 쓴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명>에서 가져왔습니다.)
1. 우리는 우리가 뇌성마비라는 것을 자각한다.
2. 우리는 강렬한 자기주장을 행한다.
3.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4. 우리는 문제 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5. 우리는 비장애인 문명을 거부한다.
배려나 자비 따윈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라고 하는 이 태도 속엔 몫을 요구하기보단 외려 몫 자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 투성이입니다. 이들 활동은 정보를 더하는 게 아니라 지우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이들이 내딛는 걸음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겨요. 가만히 살펴보면 이치카와 사오는 쉽게 지워지는 것들에 집중합니다. <헌치백>의 시작과 끝은 ‘하찮고 가벼운 이야기’입니다. 소설 주인공인 ‘샤카’에게 글쓰기란 진정성과는 거리가 먼 고타쓰 기사, 프리라이터 알바 같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 인쇄된 설계도’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등뼈가 휘기 시작해 그저 친구들처럼 될 수 있을까, 결코 좋은 인생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그 친구들 정도 수준이면 된다고 여기며 아이를 “낳는 건 못하더라도 지우는 것이나마 따라가고 싶었다”(39쪽)라고 합니다. 여기서 무게 중심은 (비장애인 친구를) ‘따라가고 싶었다’가 아니라 ‘지우는 것이나마’에 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이 책이 중증 척추 장애인의 목소리를 기록한 것뿐만 아니라 한편으론 사력을 다해 뭔가를 지우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삶을 40년 넘게 이어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목숨에 대한 다른 쓰기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한편으로 온몸으로 우리가 목숨이라 여기는 것, 몸이라 여기는 것, 그걸 바탕으로 꾸리는 삶을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쓰는 일이지 않나,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을 하나 하나 지워가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우는 것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아요.
<헌치백>은 몸으로 쓴 책입니다. 무언가를 썼고 그것이 읽혔기 때문에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겠지요. 그런데 저는 사오가 쓴 것뿐만 아니라 지운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쉽게 쓴 만큼 쉽게 지워지는 글, 스크롤을 내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타임라인을 흘러다니는 글, 무게감을 가지지 않는 글을 잔뜩 써대는 주인공과 느닷없이 이 모든 이야기가 한 호스티스가 꾸며낸 이야기라 전환해버리는 이 소설은 분명 ‘지우기’를 향해 있습니다. 백두 번째 <문학의 곳간>에선 ‘드물게’ 소설 결말에 대한 여러 생각을 나누기도 했었는데요, 저는 이 소설의 결말이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알지 못했던 중증 장애인의 생생한 살림과 목소리를 보고 듣는다고 해서 마침내 이들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믿어버리는 그 관성을 비웃고 있구나 싶기도 했어요.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무언가’를 쓰는 것보다 더 앞서는 건 ‘무엇으로’ 쓰는가이겠구나라구요. ‘무엇을’(비주류 내용) 썼기 때문에 읽히지 않는다기보단 ‘무엇으로’(눈에 띄지 않거나 중요하다 여기지 않는 것) 썼기 때문에 읽을 수 없는 게 아닐까. <헌치백>을 ‘몸으로 쓴 소설’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정작 작가가 쓰려고 한 것은 독자들이 밑줄을 치며 읽어낸 중증 여성 장애인의 고백, 당사자성이 반영된, 진정성 있는, 생생한 모습만은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더 열심히 읽어야 한다거나 소수자나 타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닙니다. 끈질기게 살아가면서 언제라도 쉽게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삶을 좇다보니 어쩌면 저마다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지 않나 싶은 거예요. 대단한 걸 쓰거나 그럴싸하게 쓰지 않았기에 무언가를 쓴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우리는’ 뭔가를 쓰고 있지 않나요. 때론 썼는지조차 모른 채 수십 년간 내내 쓰는 경우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조금 느닷없이 내어놓는 물음이지만 우리 ‘몸’은 그 동안 무엇을 써온 것일까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별 볼일 없고, 특별할 것도 없기에 아무것도 쓴 게 없다고 여기지만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읽어내지 못한 문장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요. 이치카와 사오처럼 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게 무언가를 열심히 지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모르죠, 아무것도 쓴 게 없다고 여기는 이들은 어쩌면 무언가를 지우는 데 집중해온 건 아닐까요. 애써 썼지만 곧장 지워버렸겠다 싶어요. 김비 작가님이 남자냐, 여자냐가 아니라 어디에도 안착하지 않고 끝없이 배회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저는 그 이야기가 썼다 지웠다를 끝없이 반복하는 일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건 끈질기게 쓴다는 거고, 또 변함없이 지운다는 겁니다. 지웠기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고 여기지만 실은 저마다가 뭔가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지 않나 싶어요. 사귐 시간에 저는 ‘모임을 여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는데, 열었다가 실망하기도 하고, 힘에 부쳐서 엎어지기도 하고, 다시는 모임 같은 걸 하지 말자 다짐도 하지만 변하지 않는 건 늘 모임에 대해 궁리를 한답니다. 언젠가 저는 이게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트리는 일을 반복하는 거라 생각했답니다.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온 ‘샤카’가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 주변을 끝없이 맴도는 것처럼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트리는 일을 반복하며 잇는 일. (이 세 가지를 나란히 써도 되나하는 걱정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문학의 곳간>이라는 모임이 써내려가는 것도 있겠지요. 지우기도 하구요. 여기도 저기도 깃들지 못하고 내내 맴돌거나, 공들여 쌓다가 이내 무너트리면서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참으로 끈질기구나 싶다가도 한편으론 참으로 즐겁기도 합니다.
_백두 번째 <문학의 곳간> 후기_2024년 3월 30일_부산 중앙동 '곳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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