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아파트들로 둘러싸인 연제도서관이 맹수를 피해 몸을 숨긴 초식동물처럼 보인다.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도 대피소/쉼터를 찾는 마음이 깃들어 있을까. 누가 더 크고 비싼가를 두고 쉼 없이 겨루기를 펼치는 아파트 사이를 벗어나려다보니 어느새 연산골목시장으로 발걸음이 닿는다. 커다란 이마트 오른편 아랫길은 야트막하고 낡은 집이 이어져 있다. 오가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고 갈수록 좁아지는 골목을 따라 걷다보니 문득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이즈음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연제고등학교 정문에서 동양아파트를 거쳐 다시 연제도서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여기가 어디쯤인지를 가늠해본다.
부산시 동래구 연산 7동…. 어린이 유괴 사건이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던 1980년대 중반, 누나와 나는 텔레비전 옆에 나란히 서서 빗자루를 든 어머니 앞에서 집 주소를 외웠다. 여섯 살이었던 나는 ‘부산시 동래구 연산 7동’까지 밖에 외우질 못했지만 누나가 끝내 주소를 다 외우질 못해서 매질이 내 차례까지 오지 않았다. 연산동은 1995년 동래구에서 분리되어 거제동과 함께 연제구로 편입되었고, 연산 7동은 1979년에 연산 4동에서 분리되어 2008년엔 연산 6동과 7동이 6동으로 통합되었으니 지금 지도에선 찾을 수 없다. 연산(蓮山)이란 지명을 마을 늪지대에 수련이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볼지 남쪽 금련산(金蓮山)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볼지 의견이 나뉜다고 하는데, 어렸을 적 ‘못둑’이라는 곳에 자주 갔던 기억을 떠올려본다면 늪지대-수련에서 온 이름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호메로스가 전하는 ≪일리야스≫와 ≪오뒷세이아≫는 전쟁과 고향에 얽힌 이야기다. ≪일리야스≫가 원정길(정복) 이야기라면 ≪오뒷세이아≫는 귀향길 이야기다. 문학은 고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니다. 문학은 고향을 떠나 낯선 곳을 떠도는 이야기에 가깝다. 칸트가 말한 세계시민(cosmopolitan)이란 모든 곳을 고향(익숙한 공동체)으로 여기는 이가 아닌 낯선 타향으로 여기는 이를 가리킨다.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그 어떤 경계도 뛰어넘어 어울릴 수 있다는 관점이다. 다시 연제도서관으로 오르는 길 위에서 ‘걷기’야말로 겨루기(싸움) 바깥으로 나가보려는 발돋움이고 새 길을 찾으려는 애씀이겠구나 싶다. 어딘가에 이르려는 걸음, 일구는 걸음, 갈팡질팡하는 걸음, 어슬렁이는 걸음이 어지럽게 교차한다. 유모차를 끌고, 지팡이를 짚고, 등산화를 신고, 골목과 거리 곳곳을 오가는 걸음은 낱말과 같은 흔적을 남긴다. 걸음으로 쓰는 글자가 있고 그렇게 문장이 이어져 벽돌 같은 문단이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말하자면 걷기는 고스란히 문학이 된다. 이곳을 가로지르며 깜빡이는 숱한 걸음에 ‘연제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연제구보≫ 2026년 6월호에 기고
5월부터 연제도서관에서 문학상주작가로 일한다. 독립서점 <무사이>(2023), <진주문고>(2024)에 이어 세 번째다. 두 군데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면접 장소에서 안면이 있는 이들과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둘러본 이들의 나이대가 무척 높았다. 연제도서관은 첫 방문이었지만 작은 규모와 면접관들이 보여준 진지함과 집중력이 좋아서 내심 기대했는데, 운좋게 채용이 되었다. 나 때문에 채용이 되지 못한 이들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안면이 있던 이들보다 처음 본 어른들이 먼저 생각났다. 면접장에 모인 이들 모두가 그랬지만 조금 더 움츠려든 어깨와 내리깐 시선 같은 것들이.
<회복하는 글쓰기>를 2026년에도 열었다. 낯선 이들과 어울리며 읽고 쓰기. 살림 보따리를 풀어놓고 성큼 다가갔다가 놀라며 뒷걸음질 치기.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작은 부침이 있었고 작은 기쁨이 함께 했다. 쓰고 나누었던 글뭉치를 자주 떠올리며 2024년에 펴낸 ≪살림문학≫과 이어진 책을 낼 수 있을지 궁리한다. ≪살림문학≫은 뭐랄까 선언문처럼 펴낸 책이었는데, 선언이 외침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잇는 걸음이 있어야 하니 11월까지 작게 작게 힘을 모아아야 한다.
5월과 6월은 도서관 주변을 꽤 걸어다녔다. 신축 아파트가 즐비한 동네라 거리 풍경도 걸어다니는 이들도 내가 사는 장림과 너무 달랐다. 젊은 부부와 초등학생들이 많았고 사람들 낯빛이 밝았다. 아파트가 없는 곳을 따라 걷다보면 재개발 붐이 닿지 않은 오래된 마을에 닿곤 했다. 강원도 삼척에서 2만원만 들고 외삼촌이 가구공장을 하는 부산 연산동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데, 월세방을 옮겨다니는 동안 내가 만난 주인 아주머니들이 기억난다. 석유 곤로에 밥을 지어먹었던 기억을 이야길 하니 아버지가 그 전엔 산에 나무를 베어다가 아궁이에 밥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6개월 남짓 다녔던 양동초등학교가 연제도서관 바로 옆이란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86년도엔 오전/오후반이 있었고 학교에 가려면 거의 산을 하나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서운 '산지기'가 있었고 괴팍한 할머니가 나타날까봐 무서움에 떨며 오고 갔던 기억이 남아 있다. 산이었던 곳이 아파트촌이 되었고 나는 문학상주작가가 되어 양동초등학교 4-5학년 학생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글쓰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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