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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문학성(城/性)’을 지키고 있는 '카게무샤(影武者)'들|(1-4 / 계속)

by 종업원 2012. 7. 7.


1.

2007나는 등단이라는 것을 했다등단을 하고 2~3년 간 참으로 많은 글을 썼다여기저기서 어떻게 알고 내게 청탁이 왔다매 계절 3-4개의 원고를 겁도 없이 써댔다아니나는 정말 사력을 다해서 원고를 썼었다생활없이’ ‘원고’만 썼다[‘생활’과 ‘원고’의 교환에 대해 집중해주기 바란다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어째서 원고-제도-는 생활을 잠식하는가]. 대개가 알려지지 않은 잡지들이었고,처음 들어보는 잡지도 적지 않았다청탁을 할 때 몇 가지의 요구 사항혹은 당부 사항을 전하는 이도 있었다대개는 서평을 썼고시 4-5편에 대한 작품론 혹은 작가론을 많이 썼다. 10매를 쓰기 위해 일주일에서 많게는 이주일을 꼬박 투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그렇게 생활없이 ‘문학[제도]적’인 글을 많이도 썼다떠나보낸 원고들을 기억하려 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 많던 글들은 누가 읽었을까?’ 그렇게 썼던 ‘쪽글’들의 생명력은 참으로 짧다젊은 평론가들이라 분류되는 이들은 ‘쪽글’을 쓰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나는 이름을 알리는 것에 실패했다[이 실패는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쓴 대부분의 쪽글들은 <창비>, <문지>, <문동등 이른바 메이져(더 정확하게 말해200자 원고지 고료가 장당 1만원이 아닌문예지가 아닌 교보에서도알라딘에서도 찾기 힘든 매체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어쩌면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이름 알리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그렇다고 이 논의가 ‘문단비판론’[2000년 초반 문학권력 논쟁을 하던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이 논쟁의 주요 참여자-젊은 비평가-들은 대개가 교수가 된 뒤 평론을 하지 않거나 ‘여가’ 삼아 하고 있다. 내 논의는 '지분'의 문제가 아니다]이나 '신예 비평가'[이 호칭 또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의 자괴감을 표출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다.


문단의 ‘이름’을 얻기 위해선 ‘쪽글’을 써야 한다문학잡지는 더 많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다양한 기획들을 특집 주위에 포진시켜놓는데때로는 다양한 글쓰기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장으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글들은 대개가 ‘쪽글’이기 마련이다원고 청탁에 응해 쓰는 것들이 대개 그러하겠지만 ‘쪽글’은 ‘누구라도 쓸 수 있는 글’혹은 ‘누가 써도 크게 중요하지 않는 글’이라는 점에서 ‘필자’를 염두에 두고 구성되는 섹션과는 성격을 달리 않다젊은 평론가(로 ‘분류’되어 있는 이들)들은 오늘도 ‘쪽글’을 쓴다혹시라도 누군가가 그 글을 읽고 자신의 진가를 발견해주기를더 큰 매체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원고 청탁을 해주기를 기대하며 사력을 다해쓴다실은 나는 그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등단은 했지만 ‘문단’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창비>, <문사>, <문동>[나는 많은 ‘쪽글’을 썼고 그 글들이 어떻게 내 생활을 집어삼켜버리는지어떻게 내 글쓰기를 자괴감에 빠지게 만드는지를 지켜보았다이 글은 ‘더 이상 쪽글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문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쪽글'을 쓰는 이들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은 더더욱 아니다]에 ‘쪽글’을 쓰는 이들은 자신이 쓰는 글들을 나처럼 ‘회고’ 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그러나 설사 그들이 쓰는 ‘쪽글’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이 자부심의 출처는 자신의 글이 아니라 자신의 글이 실리는 매체에 있다고 해도 좋다-이 글의 논의는 달라지지 않는다문제는 개인이 느끼는 ‘자부심’이 아니라 ‘시스템’에 있기 때문이다쪽글의 수명은 다음 쪽글이 업데이트 되는 날짜까지다그러면 또 다시 쪽글 청탁이 들어와 있다.그렇게 열심히 쪽글을 쓰다보면 ‘계’를 타는 것처럼 한 계절에 70매짜리 원고 한 두개정도는 쓸 수 있게 된다젊은 평론가들에게 쪽글은 적금이나 계와 같다외롭고 가난하기에 열심히 ‘쓴다’그 사실이 참 ‘쓰다’.



 

2.

한국에서 문학평론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외로운 일이어서 누군가가[정확하게는 어떤 문예지의 편집위원이자신을 알아봐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10~20매짜리 글을바꿔 말해 기껏해야 5~10만원의 고료를 받기 위해 일주일을이주일을 기꺼이 투자[낭비한다문학평론을 쓰는 행위가 ‘외롭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정서’인데문학평론을 쓰는 ‘행위’와 ‘외로움’이라는 정서가 교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문학[비평]이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어디에 고립되어 있는가흥미롭게도 ‘문학장’에 고립되어 있다오늘날의 한국 문학장은 하나의 ‘성()’이다아무도 찾아오지 않지만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는 기이한 ‘성’이다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쪽글’이라는 통행증을 제시해야 하고 문지기들은 그 통행증에 부착되어 ‘문학’에 대한 혈통(출신 매체와 출신 학교요즘은 출신 매체보다 출신 학교과 학과에 대한 선호도가 더 커지는 듯하다등단 제도를 무한 긍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알음알음’으로 ‘등단’하는 '인맥'들이 늘고 있다.나는 여기서 어떤 기미를 포착하게 되는데이른바 논문와 비평의 거리는 기이하리만치 멀지만 ‘대학’과 ‘문단’은 철저하게 ‘내외’하며 긴밀하게 ‘공모’한다는 사실!)과 충성도를 확인한다한 작가의 작품을 통해 얼마나 많은 ‘국경을 넘을 수 있는가’와 그 속에 감춰져 있[지도 않]는 ‘정치라는 숨은 그림’을 얼마나 많이 찾아낼 수 있으며얼마나 많은 ‘감성을 분배’했는지를 발굴하는 것이 요즘의 판별법이다한 편의 쪽글에 그 많은 것들을 담아야 하니 그 짧은 글을 쓰는 데 이주일도 부족할 터고립된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젊은 평론가들은 쪽글 뭉치를 적금처럼 매달 빠트리지 않고 입금해야 한다.그 ‘성실한 노동’을 수행할 때 ‘문학성(文學城/)’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실은 저 실체가 없는 문학성은 적금이라기보다 로또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선택받는 자들은 훗날 문학성의 문지기가 되고 선택 받지 못한 대부분은 안정적인 자리를 잡을 때(교수)까지만 비평을 쓴다평론가들 대부분이 ‘국문과’ 출신의 대학원 출신이라는 점!]. 아니 계돈을 가지고 도망친 계주와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계주는 자꾸만 도망치는데 모두가 계를 탈 마음에 가슴이 부푼다그래서 자꾸만 ‘간질거리는’ 어조로 ‘간증’한다[나 또한 얼마나 많은 간증을 했던가그 간증이 위선적이었음을 이 자리를 빌어 간증한다문학을 간음-페티쉬-해왔음을 간증한다]. 그러다 몇몇은 ‘간질’을 얻기도 한다.



 

3.

사정이 이러하기에 한국 문학장에서 별다른 의심 없이 통용되는 ‘문학성’을 구축하는 이는 사력을 다해 ‘쪽글’을 쓰는 젊은 평론가들이라고 해도 좋다불가능해보이지만 여전히 한국문학[정확하게 말해 문예지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작품]을 읽는 독자가 있다면 그들은 온갖 이론들로 점철되어 있거나 알아듣기 힘든 장광설로 이루어져 있는 ‘특집 기획’을 보기보다 주로 ‘쪽글’을 읽을 것이다[작가 인터뷰와 대담계간평과 서평 등-최근에는 문학 웹진을 통해 이러한 ‘쪽글’의 종류가 보다 다양해지고 있다.이 다양함을 한국문학의 ‘보람’이나 ‘갱신’으로읽고 있는 이도 적지 않을 테지만 나의 관점은 그와 다르다]. 이게 어떻게 된일인가한국문학을 이끌고 있는 것은 젊은 평론가들이 쓰고 있는 ‘쪽글’이란 말인가늦었지만 그래도 묻자한국문학은 왜 성 안에 고립되어 있는가? ‘군주’가 죽었기 때문이다[문학엔 원래 ‘군주’ 따위는 없었다고 나불 댈 생각일랑 하지도 말라]. 모두가 그 사실을 알지만 성 안 사람들만이 ‘쉬쉬’하며 군주의 죽음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가그러니 성 안에 들어오기 위해 쪽글을 들고 서 있는 젊은 평론가들은 ‘문상객’인 셈이다주인이 없는 성에 손님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 ‘초상날’이 흡사 ‘잔칫날’ 같다.

 

 



4.

이 풍경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1980)를 떠올리게 한다. 16세기 무로마치 시대(町時代)의 종말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카게무샤(影武者)’를 오늘날 한국문학장의 젊은 평론가들과 겹쳐보자. ‘카게무샤’가 적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영주와 닮은 가짜 무사를 가리킨다고 해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진짜’와 ‘가짜’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카게무샤로 제 소임을 다한 좀도둑이 자신이 수행했던 역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전투를 쫒아다니며 ‘주군’처럼 움직이는 ‘희극’과 중앙집권을 위한 권력 쟁투의 결과로 빗어지는 몰락이라는 ‘비극’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흥미로운 것은 의사(pseudo)역할에 집중한 나머지 본래의 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카게무샤의 정체성에 있다아니 정체성을 잃어야만 ‘자리’가 부여되는 존재 구성에 있다군주의 목숨을 대신해야 하는 카게무샤의 삶과 겹쳐보이는 것은 비단 한국문단의 젊은 평론가들만은 아닐 것이다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기며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하는 ‘피로사회’의 ‘성과주체’(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지성사, 2012)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자기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법이지그러나 이제 그것이 이기적인 일처럼 여겨지네가게무샤는 결코 자기 자신으로 설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지나는 내 형의 그림자였어이제 형을 잃고 나니 무엇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군.

_구로자와 아키라, <카게무샤>, 1980.


 

성 안으로 들어 간 사람이 성밖으로 나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성 안은 실체 없는 ‘대의’로 넘쳐나기 때문이다혼자의 몸으로 ‘대의’를 거스르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그러나 ‘성 안의 대의’는 스스로 ‘서는 것’을스스로 ‘걷는 것’을스스로 ‘쓰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그런 점에서 ‘쪽글’의 문제는 문학성을 증축하는 벽돌의 역할을 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앞에서 나는 ‘생활없이’ ‘원고’만 썼다고 했다쪽글[제도]은 생활[삶의 문법]을 잠식한다제도는 ‘나’를 지워버린다다시 말하자면 ‘문학성’은 ‘글쓰기’를 잠식한다오랫동안 형의 가게무샤 노릇을 해온 장수는 “그림자는 실체가 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그 그림자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되묻는다우리 또한 이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군주가 죽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중요한 것은 ‘군주가 살아 있느냐죽었느냐’가 아니다군주가 사라진 자리에 그림자 무사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서[]는 것이다그러니 다시문제는 ‘공기’다[그렇다. 박진영이 강조하는 바로 그 '공기'다!]죽은 군주의 어법을 흉내내는 ‘쪽글’이 아니라 자신이 내쉬는 ‘호흡법’으로 쓰는 글이 중요하다. 왜 평론가들은 '말하듯'이[자신의 삶과 생활을 반영하는] 글을 쓰지 못하는가! 앞의 말을 변주해보자그러니 시작은 다시, ‘쪽글’이다지금까지 쪽글은 문학의 성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행료였지만 이제부터 쪽글은 자신의 호흡법으로 글을 쓰는 ‘모든 이들의 것’이 된다오늘날의 비평[글쓰기]은 ‘벤야민’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쓰고 읽을 수 있는 ‘쪽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군주의 그림자가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을 사는 문사(文士)들은 자신의 호흡법으로 글을 쓰는 무사(武士)가 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