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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고장난 기계-황정은,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

by 종업원 2014. 9. 12.


2014. 9. 12


새벽에 깨어 한참을 누워 있었음에도 여전히 새벽이었다. 일어나 미루어 두었던 <문학의 곳간> 별강문을 정리하기 위해 일년 반동안 매달 1회씩 진행하며 쓴 10편의 별강문을 다시 읽어보았다. A4 44장, 원고지 274매. 매회 10~15명의 동료들이 문학의 곳간을 함께 열어주었기에 그에 응답하고자 쓴 글들을 다시 매만졌다. 내가 쓴 글이었지만 홀로 쓴 글이 아니었기에 생경한 문장들이 많았다. 뒤늦게 도착하는 문장들, 시간들. 아니 어쩌면 제 시간에 도착하는 편지들. 특이한 것은 최근에 쓴 별강문일수록 생경함이 더 크다는 점이었다. 올 봄, <문학의 곳간>에 초대되었던 한 작가가 사석에서, <문학의 곳간>에서 선물 받았던 별강문을 지금도 종종 읽어본다는 말을 전해주었을 때는 그렇게 다시 읽고 기억해주어 감사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그간의 별강문을 한 자 한 자 다시 읽으니 정성을 다한 시간들이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듯한 별스러운 감정까지 들었다. 별강문 정리한 파일을 받은 내 동료는 이런 내용의 메일을 보내주었다. "멋부리지 않고, 무게 잡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 속에 충실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순간들을 버팀목 삼아 쓴 글인 거 같아" 한사코 새벽에만 머물러 있을 거 같았던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윗옷을 벗고 팔굽혀 펴기를 했다. 샤워를 하면서 한 손에 쥐었던 비누를 떨어트릴 정도로 혹독하게 내가 나를 들어올렸다. 정성을 다하고 성실한 시간이 나를 일으켜 세웠고 정성을 다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는 시간이 나를 재촉했다.   


  


           



1. 일렁이는 이름


‘자리’를 갖지 못해 희미해져만 가는 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조심스레 부른다. 존재가 희미하기에 이 세계가 난폭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세계의 난폭함에 존재가 더욱 희미해져만 가는 것인지 확언할 수 없지만 희미한 이들의 삶이 지금보다 더욱 희미해질 것임을 슬프게 예감할 수 있다. 희미해서 더 희미해질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언젠가는 그 이름을 부를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고요한 목소리 속엔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용기의 파동이 겹쳐 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잠잠한 수면을 일렁이게 만드는 일과 같다. 일렁이는 물결은 바람의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용기의 얼굴이기도 한 셈이다. 사람이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렇게 일렁인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만 그렇게 조금 일렁일 수 있다. 그것은 거울처럼 되비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되비춤으로써 잠깐 다른 얼굴을 가지는 것이다. 물이 일렁일 때 잠깐 비치는 물빛. 태워버리지 않고 흔드는 빛. 우리를 깨우고 또 부르는 빛.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꼭 그와 같다.  


‘무재 씨’가 ‘은교 씨’를 부를 때, ‘은교 씨’가 ‘무재 씨’를 부를 때 우리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를 때만 잠깐 나타나는 얼굴을 보게 된다. 희미한 존재들이 희미한 이름을 부르는 조심스런 목소리, 떨리는 목소리, 용기를 낸 목소리. 그러니 나는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동원되는 ‘씨’라는 호칭이 희박한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축복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야, 임마, 이 새끼, 이 놈, 이 년’으로 속절없이 미끄러지는 희미한 존재를 ‘씨’가 버텨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렇게 기꺼이 상대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이름 뒤에 ‘씨’라는 버팀목을 대어주는 것은 상대의 말을 따라하는 것만큼 무용한 일인 것처럼 보이다. “무서워요. / 무서워요? / 무섭지 않아요? / 무서워요. / 무서워요? / 네. / 성큼성큼 걸어가며 무재 씨가 말했다. / 무서워요. 나도.”(14쪽) 무서움에 관한 대화. 누군가에게 무서움에 대해 말하고 무섭다는 말을 반복하는 이 무용해보이는 대화가 세계의 무서움을 일렁이게 한다. 무서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해서 무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 상대의 말 뒤에 그 말을 따라하는(뒤따르는) 말이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에 무게를 실어주는 연합전선. 무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너의 무서움 뒤에 나의 무서움으로 버텨내는 것. 말이 안착할 수 있는 자리는 그렇게 마련된다. 연약한 목소리, 별다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말, 연필 자국처럼 희미한 말 위에 또 다른 연필 자국을 덧칠 하는 것처럼 상대의 말을 반복하는 것. 되비추는 말, 일렁이는 말. 그렇게 서로의 말을 되비추면서 우리는 조금 더 말할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른다.  



2. 존엄의 스위치를 켜는 일


『백의 그림자』에서 ‘은교 씨’와 ‘무재 씨’가 나누는 대화는 일상적이고 무심하기만 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별 볼일 없는 그들의 삶처럼 짧은 대화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꽉차 있다. 어째서 이 대화가 ‘꽉찬’ 것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말’이 존재의 존엄에 스위치를 켜는 행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일어서서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것이 내겐 ‘존엄’의 상실처럼 보였다. 존재의 무게를 가지지 못하는 이들의 종착역은 그렇게 존엄을 박탈당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플랫폼에 붙박히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의 말이 존재 위에 내려앉을 때, 가까스로 존엄이 지켜진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처럼, 강 건너에 희미하게 불 밝힌 등불처럼, 세계가 일렁이는 순간. 그것을 환영이라 불러도 좋을까, 그것이 한갓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 목소리를, 그 희미한 빛을 차라리 환영이라고, 환상이라고 부르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환영, 환상, 착각, 착시를 통해서만 개창되는 세계가 있다. 세계가 말을 낳는 것이 아니라 ‘말’이 없던 세계를 연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순간, 누군가에게 반하는 순간이야말로 환영과 환상에 휩싸인 순간이며 순간적인 착시가 일어나는 순간이 아니던가.  


피복이 벗겨진 전선에 흐르는 전류. 전류가 계속 흐르기 위해선 피복이 벗겨진, 헐벗은 그 자리를 잘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세계의 폭력에 헐벗은 존재들이 구현하는 환영의 연합전선이 헐벗은 문턱을 훌쩍 넘는다. 무재 씨와 은교 씨의 대화는 헐벗은 세계를 넘어 서로를 잇는 전류다. 그렇다. 그들의 대화는 ‘부품’과 같다. 고장난 기계(세계)가 새 것이 아닌 고장난 채로 조금 더 가동될 수 있게, 그렇게 지속할 수 있게 부품의 쓸모를 유지하는 것(낡고 낡은 차를 타고 뜨거운 국물을 마치러 떠나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라). 최소화되어 있는 말. 말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말’을 통해 개창해야 하는 세계의 축소를 가리킨다. ‘말’이 없다는 것은 말을 통해 열어가고자 하는 ‘희망’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환상과 환영은 ‘과잉’의 산물이 아니다. 넘쳐남의 영역이 아니라 최소한의 영역에서 우리는 환상과 환영을 만난다. 그것이 황정은의 소설작법이면서 동시에 참담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어가야 할 대화법이기도 할 것이다.  



3. 존재 속의 인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속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존엄의 힘이 쟁여져 있다. 나는 그 힘을 ‘인디적인 것’(송진희)이라 바꿔 부르고 싶다. 희미해져 가는 이름 위에 덧칠하는 한 줄의 연필 자국. 인디적인 것이란 그렇게 기꺼이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다. 희미해져 가는 것을 살려내는 힘이다. ‘인디적인 것’은 저마다의 이름 속에 있다. 우리 모두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 이름 속에 공평하게 나눠져(share/divide) 있는 ‘인디’라는 ‘고유성’.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호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기꺼이 존엄의 파수꾼이, 존재의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인디가 우리를 부른다. 우리를 흔든다. 우리를 살린다. 그렇게 우리가 일렁인다. 우리가 우리는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한다. 희미하지만 같은 목소리로.     



<문학의 곳간> 6회 별강문 / 2014. 1. 28 / 남천동 <고양이 다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