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접한다는 것
내 아버지는 용접공이었다. 결혼을 한 이듬해 고향이었던 강원도 삼척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다 어깨 너머로 배운 용접일로 한 시절을 보냈다. 당연히 용접 자격증 따위는 없었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팀을 꾸려 언제, 어디라도 불러만 주면 달려갔다. 야무지고 기술이 좋다는 입소문 덕에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새벽에도, 휴일에도,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일거리가 생기면 달려 나가 용접을 했다. 식사 시간을 뚝 떼어내고, 잠자리를 뚝 떼어내서 철골들을 이어붙이고 무수한 구멍과 빈틈들을 때웠다. 그렇게 떼어낸 삶을 밑천으로 세간을 꾸렸다. 살림은 밖에서도 훤히 다 보일정도로 말갰고 삶 또한 단 한 번의 우회 없이 직립의 방향으로, 이렇다 할 감춤이 없었다. 다만 점점 말을 잃어갔다. 이미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말을 더듬는 내 아버지가 한때 용접공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 삶을 떼어내 누군가의 삶을 때워온 한 노동자의의 더듬거리는 말 속에서 ‘용접’이라는 것이 이음매들을 감추거나 위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려 제 태생과 노동을, 상처와 세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임을 뒤늦게 자각하게 된다.
쉴틈 없는 ‘노동’ 탓에 한 때 용접공이었던 한 남자는 지금 말을 더듬는다. 단어와 단어의 이음매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덜컥거리며 겨우 다가오는 그 문장들 속에서 나는 노동의 가치나 희생의 아름다움 따위를 읽어내려 노력했지만 그것이 세상과 아귀가 맞지 않았던 그의 삶을 보기 좋은 방식으로 봉합하려는 내 욕망의 산물이었음을, 용의주도한 알리바이였음을 알겠다. 노동을 포장하려는 욕망이 ‘나’에게로 넘어오려는 ‘너’를 차단하는 바리케이트가 되거나 족쇄가 되어 ‘나’와 ‘너’라는 각각의 세계에 유폐시켜버린다는 것을 알겠다. 노동을 미화하려는 내 욕망이 외려 그의 뭉툭한 손마디를, 절룩거리는 걸음을, 상처를 뒤덮은 삶의 주름을 삭제해버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 아버지가 유독 내 앞에서 더욱 말을 더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더듬는 말’ 속에서 그 무엇도 듣거나 읽어내지 못한 것은 그저 노쇠로 인한 결여의 증표에 불과해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실은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오래된 전체주의의 강령이자 자본제 시장의 논리를 내가 아직도 신화처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에 대한 신성화’는 노동의 말 위에 군림하여 그 자리에서 노동의 말을 기각하고 삭제한다. 실제 하는 노동을 관념의 세계로, 사적인 것으로 추방해버린 역사의 윤전기 위의 작은 톱니바퀴 같은 활판으로, 내가 그렇게 노동을 유폐(foreclosure)시켜버리는 체제의 단말기가 되어 읽고 써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백무산을 노동자 출신의 시인이나 노동시인이라고 불러왔지만 그가 “우리 생명은 분명 노동이 갉아먹고 있었다”(「노동의 추억」,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8)고 선언함으로써 시인의 이름(무한한白 무無산産 계급proletariat의 이름)에 다가섰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시적 공간이 노동의 현장과 연동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시를 노동시의 한 양상으로 규정하는 데 용이한 참조 지점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인간의 조건’이라는 문제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음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하겠다. 오랫동안 그가 불러왔던 노래들이 ‘노동자다움’에 대한 각성이나 ‘노동의 신성함’ 따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한 열망이었으며 그에 대한 정당한 요구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1 그렇기에 최근까지도 “인간만의 특별한 신체를 만든 건 / 노동의 역사 때문이라는 자연변증법보다 / 인간을 욕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춤추는 인간」,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2012)라는 확고한 신념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현실’이라는 두루뭉술한 말로 덮어버리곤 하는 ‘인간의 조건’의 양상을 분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의 시적 변모야 <<인간의 시간>>(창작과비평사, 1996)에서부터 분명한 궤적을 남기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의 시에서 노동이 아닌 선(禪)이나 불교의 흔적을 보거나 생태주의적 관점을 만난다고 해도 이를 방향 전환이나 노선 변경이라는 말로 쉽게 규정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적 포섭이 형식적인 수준을 넘어 노동을 하는 시간과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을 구분할 수 없는 실제적인 포섭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 아래에서, 노동이 이미 삶의 전 영역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무방한 현실의 조건을 그의 시가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신학적 믿음의 힘이 구성원들의 삶을 폭력적으로 주관하고 있는 지금-여기-우리-앞에 놓여 있는 노동문학이란, 시효가 만료된 양식이 아니라 매번 재구성함으로써 ‘삶의 조건’을 감각하고 ‘인간의 조건’을 갱신하기 위한 중요한 창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백무산에게 시 쓰기란 ‘삶의 조건’을 결정하는 힘의 논리를 예민하게 감각하면서 ‘인간의 조건’에 대한 물음을 중단하지 않는 태도 위에서 수행된다. 다시 말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는 것을 지향하며 이때 ‘저곳’에 대한 지향은 ‘이곳’을 초월하는 도원을 귀착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획득하는 실천적 의미를 가진다.
백무산은 내게 ‘시를 쓰는 행위’ 옆에 ‘용접하는 행위’를 놓아두도록 요청한다. 이때 ‘시를 쓰는 행위’는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노동’과 구분되는 창조적 활동인 것만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용접’ 또한 단순 노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두 행위 사이의 거리와 간극은 내게 ‘시 쓰기’와 ‘용접’을 통합하거나 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명백히 드러내면서 동시에 둘 사이에 새로운 길을 뚫어내야 한다는 요청으로 다가 온다. 용접한다는 것, 이것과 저것을 이어 붙이는 작업은 양자의 위에서 군림하는 권력적 행위가 아니다. 군림하는 자의 힘으로 둘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떨어져 있는 것들에 ‘관계 양식’을 부여함으로써 저마다의 ‘흐름’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용접한다는 것’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넘어간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접촉’의 다른 이름이다. 접촉을 통해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 다른 ‘나-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접한다는 것은 통합된 ‘나/너’이거나 침범하는 ‘나/너’가 아니라 접촉하는 ‘나-너’를 의미한다. ‘시 쓰기’가 꼭 그와 같다.
백무산의 시에서 내가 읽고자 하는 것은 용접공이었던 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떼어내어 살림을 때우던 용접이라는 행위 속에 녹아 있는 다른 삶(존재)을 살고자 하는 열망. ‘순접’이 허락되는 않는 삶의 조건 아래에서 수행 했던 ‘용접’이라는 행위의 역사에서 나는 차마 쓰지 못한 시, 아직 씌어지지 않은 ‘시’를 읽어보고자 한다. “자유란 지금의 나를 청산할 수 있을 때 / 나를 거덜낼 수 있을 때 온다”(「존재여행」, <<그 모든 가장자리>>)고 확신했던 ‘시인’의 말은 ‘노동자’의 말이기도 하며 ‘우리’의 말이기도 하다. 이 글은 ‘그 말들’을 밑천 삼아 나아가야할 터이니 이제부터 그 말은 나의 말이기도 하다. 그 말을 절취하고 변주함으로써 ‘나’의 이름표를 달아 소유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희미해지는 그 말에 우리의 이름표를, 인간의 이름표를 다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용접’일 것이다. 시 쓰기와 용접(노동)의 사이에서 새로운 흐름의 길을 뚫어내기 위해선 비평 또한 ‘순접’이 아닌 ‘용접’의 문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을, 용접공이 쓰지 못한 시에 가닿기 위해서는 통합하고 규정하는 힘, 내리치는 힘이 아닌 이어붙이는 힘, 살려내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평생을 ‘용접’ 해왔던 그 노동 속에서, 시 쓰기 속에서 애써 배워야 한다는 것을 내 글이, 내 몸이 깨칠 수 있을 것인가.
2. 무한하게 열리는 몸
“이미 광장엔 빈틈없이 죽음이 고여 있다”(「투우」)라는 시인의 판단은 정세에 대한 것이면서 동시에 삶의 조건에 대한 감각이기도 하다. 광장의 죽음을 먼저 감지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몸이다(“몸은 숯불을 삼킨 것 같고/심장은 얼음처럼 차갑다”). 백무산에게 ‘몸’이란 감옥이면서 광장이고, 꽉 차 있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그것은 마치 ‘캔’과 같은 것이다. “나는 내용물은 줘버리고 캔을 가지고 싶어한다”(「can」, <<그 모든 가장자리>>)는 구절에서 우리는 백무산이 몸을 단지 한 개인의 역사가 기입되어 있는 저장고(“하필 몸은 허기진 시절만 그리워하는 걸까”, 「몸이여」, <<그 모든 가장자리>>)라는 의미보다 세계를 변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읽어내야 한다. ‘내용물’은 “일회적이고 수동적이고 소모적”인 데 반해 “캔은 내용과 상관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물받이”, “똥장군”, “두레박”, “곡식 바가지”, “화분”, “로켓”, “소도구” 등 다양한 것으로 변주된다는 점에서 몸은 곧 무언가를 할 수 있는(can) 가능성이자 그러한 의지와 능력(potential)이 내장되어 있는 장소(lieu)의 의미를 가진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살’이야말로 ‘말’이 생성되는 장소라 말해왔지 않은가(“살 속에 말이 있다 / 살은 스스로 말을 한다 / 어설픈 이성은 그 말을 막는다 // 노동의 근육 속에는 말이 있다”, 「노동의 근육」, <<만국의 노동자여>>). 중요한 것은 ‘노동의 근육’이라는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내용이 기입되고 변주되는 ‘몸’에 있다. 몸이라는 생성의 자리(“살은 창조를 한다”). 광장에 고여 있는 죽음을 감지한 것은 ‘몸’이었다. 그러나 몸이야말로 죽음으로 넘쳐나는 장소이며 “어김없이 파탄적인 것”(장-뤽 낭시, 김예령 옮김, <<코르푸스corpus>>, 문학과지성사, 2012, 11쪽)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몸이 생성의 장소일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동시에 파국의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확신이 타격을 받아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몸이라고 한 것은 장-뤽 낭시였다. 백무산에게 몸은 집과 같은 안락한 머묾의 장소가 아니라 언제라도 ‘노동’에 잠식될 수 있는 잠재적인 식민지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아가지 못하나 머물지도 못하는 곳”(「경계」, <<인간의 시간>>, 창작과비평사, 1996)이란 선택할 수 없는 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 양태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몸은 외부와의 접촉을 통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인간의 몸에는 춤이 눌러 담겨 있다”(「춤추는 인간」, <<그 모든 가장자리>>)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 바로 그 몸이야말로 밖으로 나가려는 행위와 의지가 내장되어 있는 ‘열림의 장소’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백무산에게 몸은 통합될 수도 고정될 수도 없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체이며 동시에 밖으로 열려 있음으로써 외부와 무수한 접촉면을 생성해내는 장이다.
열려 있음l’ouvert 그 자체에서 이미 몸은 (근원적인 있음 이상으로) 무한하게 있다. 그것 바로 그 자체에서 이처럼 침투 없는 관통, 혼합 없는 접전이 발생하는 것이다.
-장-뤽 낭시, <<코르푸스>>, 31쪽
대상을 장악하거나 포획하지 않고 무수한 접촉면을 만들어낼 때 ‘몸’은 무한히 열린다. 바깥으로 열릴 때 몸은 더 이상 하나(닫힌 몸)가 아니다. 몸을 움직여야 삶이 허락되었던 한 노동자가 그 몸을 변주해 시인이 되었다. 몸의 열림이 무한한 몸을 생성한다. 그것은 곧 노동에 결박되었던 몸, 하나의 삶만이 허락되었던 그 몸을 써서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 것이라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어딘가에 종속되고, 속박되고, 감금되어봤던 이는 ‘대안’이나 ‘자유’를 지향하되 그것이 또 다른 종속, 속박, 감금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한다. “시는 안(국가, 길, 나, 시)에 있으나 밖을 향하는 물건”(백무산, 「후기」, <<길 밖의 길>>, 갈무리, 2004, 143쪽)이라는 시적 태도는 바깥에 대한 사유-실천과 연동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바깥은 내가 더 태어나야할 곳이다 나의 잠재적인 신체”(「인간의 바깥」)라는 대목은 백무산의 시적 원리이면서 동시에 ‘몸의 원리’이기도 하다. 백무산에게 ‘몸’은 시의 질료(material)이면서 시의 원리다. 그 자리는 ‘시’만이 독점할 수 있는 공간(place)이 아니라 언제라도 ‘노동’이나 ‘삶’,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열린 공간(lieu)이다. 바깥으로 열린 몸, “잠재적 신체”란 백무산의 ‘시론’이자 ‘몸론’이며 동시에 ‘혁명론’인 것이다. 낭시는 몸‘에 대해서’가 아니라 ‘몸 자체를 쓴다’고 했다. 쓰는 것이 끝과 접촉하는 것이라면 몸 또한 그런 방식으로 경계에, 극단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라며 “경계가 글쓰기가 발생하는 자리다”(장-뤽 낭시, 앞의 책, 14쪽)는 문장을 썼다. 이 문장은 낭시의 것이지만 백무산을 통해서만 인용할 수 있는 문장이라는 것, 동시에 그것은 내가 한 ‘용접의 흔적’이기도 하다.
3. 노동자들의 문서고 : 몸이라는 공동-체
백무산은 환경과 정세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몸에서 단지 벌거벗겨진 상태(bare state)를 현시하는 수동적인 영역만이 아닌 밖으로 열려 있는 벌거벗음이라는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영역 또한 고안해냈다. 바깥으로 열린 몸에서 나는 여러 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양피지(parchment)를 본다. ‘몸’이란 단지 한 개인의 역사가 기입되어 있는 저장고의 의미만 가지는 것은 아닐 테다. 반응하는 몸, 감지하는 몸, 각성하는 몸, 노동하는 몸, 노동이 아닌 다른 행위를 촉구하는 몸, 춤추는 몸, 무한히 다른 것으로 이행(passage)하는 몸. 이렇듯 약동하는 몸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지만 미처 그 몸들에 미치지 못하는 나는 뒤늦게나마 그 몸-양피지 위에 덧입혀 지는 문자들, 기록들을 읽을 따름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무한히 열리는 몸은 노동자들의 또 다른 문서고(文書庫)라는 사실을.
타는 볕을 쬐어야 하고 언 바람에 피를 식혀야 한다 / 그래야 살 수 있다 나는 변온동물이기 때문이다 // 내 피는 식었다 뜨거웠다 한다 / 세상 사정은 내 심장에 들어오고 나간다 / 기쁨을 쬐어야 하고 슬픔도 일용할 양식이다 / 먼 곳의 눈물과 환호도 내 간 속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 어두운 곳의 절규와 더러운 곳의 축제도 / 나의 폐부를 할퀴며 들어오고 나간다 / 내 몸에는 항온을 유지할 두꺼운 비곗덩이가 없다 / 내 살은 구리처럼 전도율이 높아 슬픔도 바람도 / 골수에 바로 전한다 나는 너무 뜨겁고 너무 차갑다 // 그래서 종종 내 주체가 피부에 있는지 심장에 있는지 뇌에 있는지 / 더 깊은 곳에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 어쩌면 몸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지만 / 상관하지 않는다 인간을 유지해야 하는 걸까 /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 그렇게 생각할 때만 내가 인간인 것 같다 / 항온을 유지할 만큼 나는 나를 책임지지 못한다 / 오랫동안 심장이 뛰지 않은 채 한곳에 머물렀던 적도 있었다 //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정이 나를 해체하는 건 아니다 / 나의 심장에 햇볕도 기쁨도 소용없을 때가 있다 / 오직 너를 쬐어야만 할 때가 있다 / 먼 대륙의 바람이 심장을 자주 달구었지만 나는 떠날 수 없었다 / 너 대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낮고 어두운 곳에서 울고 있는 너 때문에 / 너의 차디찬 피가 멈추었던 내 심장을 뛰게 했으므로
-「너를 쬐어야 한다」 전문, <<그 모든 가장자리>>
백무산이 말하는 ‘변온동물’이란 영향을 주고받음을 통해서만 살 수 있는 ‘몸’과 다르지 않다. ‘열린 몸’은 단지 생물적인 조건(“타는 볕을 쬐어야 하고 언 바람에 피를 식혀야 한다”)인 것만은 아니다. “세상의 사정”이 들고 나는 곳이 피를 뿜어내는 순환 운동을 멈추지 않는 “심장”이라는 점, “기쁨” 뿐만 아니라 “슬픔” 또한 일용할 양식이라는 점, “먼 곳의 눈물과 환호”가 또 다른 장기에 들고 나간다는 점, 그러한 열림에 의해 “폐부를 할퀴며” 상처를 입기도 한다는 점에서 ‘몸’이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이자 태도이기도 하다. ‘안’이 아닌 ‘밖’에 있을 때만 ‘인간’인 것 같다는 대목은 앞서 언급한 “잠재적 신체”와 조응한다. 그러니 “멈추었던 내 심장을 뛰게” 한 ‘너’란 몸 밖에 있는 또 다른 장부(臟腑)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동시에 ‘나-너-세계’의 만남과 교차, 시작과 끝이 빼곡히 기입되어 있는 장부(帳簿/文書庫)이기도 하다.
“누군가 곁에 있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밤 서울역」, <<그 모든 가장자리>>)는 예감은 실존 감각이며, 정치적 감각이자 윤리적인 감각과 다르지 않다. “찢긴 우리들 몸뚱아리가 곧 말씀이 되길 원했”(「저녁기도-종이에게」, <<만국의 노동자여>>)던 오래 전의 염원이야말로 현실의 패배 속에서도 “깍지를 낀 채 일어”(「지옥선 3-조선소」, <<만국의 노동자여>>)설 수 있는 조건이었지 않은가. 현실을 딛고서 그 제약을 뚫으려 했던 몸이라는 ‘조건(condition)’은 이제 “너의 차디찬 피가 멈추었던 내 심장을 뛰게” 하는 ‘능력(potential/puissance)’으로 발현된다.그러므로 백무산은 몸‘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노래한다. ‘이 몸(a body)’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아니 오직 하나이면서 여럿이 된다. 무한히 열려진 몸은 그래서 무한한 하나(a singular)인 것이다. 공동의 몸, 아니 몸이라는 공동-체. 2
몸은 이미 열림이며 밖(너-세계)과 접촉할 수 있는 창구이기에 미미하고 연약한 “작은 풀씨”가 다른 것으로 도약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몸에 묻어 있는 희미하고 연약한 “퍼렇게 멍이 든 씨앗 하나”가 “찰나의 단호함”으로 “모든 의지에 우선하는 자유낙하”(「자유낙하」)의 도약을 감행한다. 백무산은 ‘평화’를 “숨죽이는 일”이며 “내 자리를 비우는 일”(「돌아오지 않는 길」, <<거대한 일상>>, 창비, 2008)이라고 했다. ‘흐르게 하는 일’이 ‘살리는 일’이라고 했다. 연대하고 접속하는 몸, “관계이면서 동시에 존재” 3인 몸, 존재들의 어울림이 약동하는 몸, 아직 꽃을 틔우지도, 열매를 맺지도 못한 멍든 씨앗 하나가 ‘찰나의 단호함’으로 ‘자유낙하’ 하는 그 순간을 백무산의 몸은 시라고 쓴다.
4. “시작하는 자 자신의 시작” : ‘용접’이라는 공통의 능력
내게 번듯한 책상 하나 생겼을 때 / 책상 하나 없이 쉰을 넘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하지만 내게도 아끼던 책상이 하나 있었다 / 버린 사과궤짝과 공사장 아시바와 땔감 잡목과 / 태풍에 쓰러진 은행나무와 공동묘지에서 주워온 널빤지로 / 짠 현란한 앉은뱅이 내 책상 // 그곳에서 읽었다 소리 내어 읽고 숨죽여 읽고 / 손톱으로 긁어대며 읽고 졸면서 읽고 / 머리를 찧어가며 읽고 눈물 떨구며 읽고 / 주먹을 쥐며 읽고 졸다 읽다 졸다 새벽에 일 나갔다 / 학교와는 천리나 멀고 도서관과는 만리나 먼 곳에 그 책상이 있었다 / 아무 용도도 실용도 없던 내 목록들 / 그저 허기만으로 채워진 그 목록들 / 불에 타버렸지 젊은 날들이 몽땅 / 활활 불길에 다 타버렸지 추억마저 빈털털이가 되었지 // 그리고 훗날 간신히 찾은 길과 겨우 일궈낸 터전이 / 다시 파도에 남김없이 쓸려갔을 때 / 그 홍수에 망연자실 허우적거릴 때 / 어디선가 둥둥 떠내려 와 나를 건져준 뗏목 하나 있었지 / 그 책상이었지
-「그 책상」 전문
누군가가 버린 쓰레기와 공사장의 잔여가 난파당한 삶을 지탱하는 ‘책상’으로 변용된다. 어떤 이는 난파의 현장에서 끝을 보지만 어떤 이는 새로운 시작의 순간을 본다. 폐허의 잔해들을 끌어모아 ‘문’을 만들어 다른 시간으로 진입하는 능력. 그것을 열린 몸의 능력이자 삶-능력이라고 불러도 좋다.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네게 건네면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공통된 것(the common)’으로 변용(affection) 하는 구성적 활동의 무한한 반복을 ‘용접하는 능력’이라 부르기로 하자. ‘용접’은 떨어져 있는 것, 분리되어 있는 것을 기능적으로 이어붙이는 게(통합) 아니다. 실제 용접에 있어서도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은 동일한 철들을 빈틈 없이 때우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철’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성분을 면밀히 파악하고 감지하는 데 있다. 4 철들의 성분을 파악하지 않은 채 그저 이어붙이기만 하면 작은 압력에도 떨어지게 된다. 용접의 요체는 철을 ‘아는 것’이 아닌 ‘이해하는 것’인 셈이다. 분리되어 있는 이것과 저것을 잘 잇기 위해선 우선 잘 녹여야 한다. ‘몸’의 능력은 잘 녹을 수 있을 때 발현될 수 있는 것일 터. 그러므로 ‘몸’이란 접합 부위에 녹여 붙이는 녹는점이 낮은 금속인 ‘용접봉(鎔接棒)’과 다르지 않다 하겠다. 용접한다는 것과 변용한다는 것이, 접촉한다는 것과 나눈다는 것이 몸을 ‘쓰는 것’을 통해 이어진다.
폐허의 잔해들로 이어붙인 ‘책상’에 울퉁불퉁한 용접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 상처들은 열림의 흔적이며 나눔의 증표다. 그 책상에서 소리 내어, 숨죽여, 졸며, 머리를 찧어가며, 눈물 떨구며 읽었던 “아무 용도도 실용도 없던 (내) 목록들”과 “그저 허기만으로 채워진 (그) 목록들”은 “홍수에 망연자실 허우적거릴 때” 뗏목처럼 떠내려와 ‘나’를 건져준다. ‘말’과 ‘행위’를 물리적 대상으로가 아니라 인간(존재)으로서 서로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양식이라고 했던 이는 한나 아렌트(H. Arendt)였다. 말과 행위를 통해 인간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제 2의 탄생을, 어떤 것의 시작이 아니라 “시작하는 자 자신의 시작” 5을 감행할 수 있다고 할 때 용접 자국들로 울퉁불퉁한 “그 책상”에서 무수하게 발명되었던 것은 다름 아닌 ‘말’과 ‘행위’였을 것이다. “깎아내고 추방”함으로써 획득하는 “반듯함의 미학”이 아닌 “굽고 못생긴”(「구불구불한 정의」) 그 책상 위에서 ‘예상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불가능한 것’을 수행했던 것이다. 폐허라는 삶의 조건을 변용하여 창조한 ‘구불구불한 책상’과 그 위에서 수행했던 ‘읽기와 쓰기’(말과 행위)에서 우리는 ‘개인의 역사(history)’가 ‘인간의 역사(History)’와 울퉁불퉁하게,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는 용접 자국을 보게 된다.
백무산이 쓴 시를 읽는 것이 ‘열린 몸’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때 마찬가지로 그것은 한 시인의 기록이 아닌 노동자들의 문서고를 뒤지는 것과 같다. 그곳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착취/지배 메커니즘에 대해 스스로 자각해가는 간 투쟁의 연대기가 아니라, 피착취/피지배의 운명과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는 사유의 싹이다. 자신들만의 고유한 사유가 아닌 다른 이의 사유와 말을 전유하려는 의지에 의해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말하는 존재, 사유하는 존재’들’로 용접-구성되었다. 사회 질서 속에서 각자에게 분배된 자리와 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정체화’, ‘자리 옮김’의 형상에 대해 주목한 이는 자크 랑시에르(J. Rancière)였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어둑한 세계의 벽을 넘어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라 ‘공통의 일’에 종사하기 위해 ‘깍지를 끼고 일어섰던 것’이다. 6 그 길 나섬 위에서 그들은 사물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사물들의 틈을 만들거나 이어붙이고, 주어진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개입했다. 기꺼이 제 몸을 녹여 용접함으로써, 제 몫을 건네주고 나눔으로써 생성한 흐름 속에서, “뿌리와 가지를 먹고 자랐으나 / 그들과 단절한 꽃”(「모든 것이 전부인 이유」, <<인간의 시간>>)이 피었던 것이다. 그러니 다시 그 ‘경계’ 위에 설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매번 밖을 향해 나(눌)설 수 있어야 한다. 지금-여기-우리의 자리에서 다시, 몸을 써서 나눔과 연대를, 용접을 시작해야 한다.
- 1. 노동에 대한 백무산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육성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삶을 바꾸지 못하는 노동은 오히려 노동이 사람을 소외시킵니다. 결국 삶은 노동을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았죠. 문제는 삶이죠.” 이기인·백무산 대담, 「미래의 노동, 미래의 노동시」, ≪열린시학≫ 2008년 봄호, 36쪽. [본문으로]
- 2. <<코르푸스corpus>>의 일본어 번역본 제목은 놀랍게도 ‘공동共同-체体’이다. Jean‐Luc Nancy, 大西 雅一郎 옮김, <<共同‐体(コルプス)>>, 松籟社, 1996. [본문으로]
- 3. 조정환, 「바람의 시간, 존재의 노래」, <<카이로스의 문학>>, 갈무리, 2006, 326쪽. [본문으로]
- 4. ‘용접’에 관한 모티브와 정보는 일평생 육체 노동자로 살아오고 계신 내 아버지(김종윤, 1952~)로부터 제공 받은 것이다. [본문으로]
- 5. 한나 아렌트, 이진우·태정호 옮김,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238쪽 [본문으로]
- 6.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옮긴이의 덧말」,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 길, 2008, 38쪽(몇몇 대목을 필자의 의도에 맞게 수정 하였고 백무산의 시와 ‘용접’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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