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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살림9

눈을 감고 2025. 3. 12늘 같은 곳을 달려도 달리는 몸과 마음이 다르고, 부는 바람결과 풍기는 냄새가 다르고, 별빛과 밤구름도 같은 적 없으니 오늘도 다른 길이다. 가볍게 입고 바깥에 나설 때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 순간은 언제나 좋다. 발을 내딛을 때 넉넉하게 받아주는 땅과 가볍게 튕기며 저절로 나아가는 발바닥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맞춰서 손뼉을 치는 듯해 발구르기도 신이 난다. 두어달 멈췄던 세미나를 다시 연 날, 발제는 끝냈고 봄밤에 부는 바람은 선선하고 냉장고엔 어제 만들어둔 음식도 남았으니 반병쯤 남은 와인을 곁들일 수 있다. 세미나를 마치고 한결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달리러 나섰다. 오늘밤 나는 누가 뭐래도 넉넉한 사람이다.다대포 바닷가를 곁에 두고 달리다가 문득 눈을 감고 달려보고 싶었다... 2025. 3. 22.
그림자가 비추다 2024. 8. 2 5월부터 진주를 오간다. 8월이 되었으니 한 계절을 오간 셈인데, 누구와도 사귀지 못하고 무엇도 좋아하지 못했다. 여전히 낯설게 오갈 뿐이다. 이번 주는 진주에서 하루 묵어야겠다 싶어 숙소를 잡고 그곳에서 남강까지 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다들 여름휴가를 떠났는지 오늘 낮부터 모임에 나올 수 없다는 알림이 자꾸 울린다. 이런 날엔 서로 더 가까이서 살갑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저마다 쓴 글을 차근차근 짚어가며 이야기를 건네야겠다 싶어 여느 때완 다른 몇 가지 이야기를 적어두었다.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모임을 정리하고 숙소로 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 남강 곁을 달렸다. 멀찌감치서 바라만 봐왔던 터라 그저 이뻐보이기만 했는데, 그 곁을 달리다보니 새삼 강이 어떻게 흐르는지 궁금했다... 2024. 8. 4.
작게 2024. 6. 8 며칠 동안 수업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래가 끓고 목이 잠겼는데, 이렇다할 이유를 찾진 못했다. 이럴 때 몸과 마음을 더듬어보게 되는데, 적어도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달치 정도는 챙길 수 있어야 하지 싶다. 먹고 자는 일, 마음 쓰고 생각한 것들를 차분히 챙긴다면 목이 잠긴 까닭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어제 일도 가물거리는 형편이다. 나날이 나빠지는 게 아니라 천천히 나아지고 있어서 가볍게 뛰어봐야겠다 싶었다. 달리기가 이럴 때 몸과 마음에 어떻게 이바지 하는지 살펴보고도 싶고, 혹은 얼마나 훼방을 놓는지도 궁금해서 여느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나섰다. 달리다가 힘들다 싶으면 언제라도 멈추고 돌아갈 수 있는 ‘장림-다대포해수욕장’ 길이 나아보였지만 감천항을 끼고 달리고 싶어.. 2024. 6. 8.
낯선 고향 쪽으로⏤코로만 숨 쉬기(5) 2023. 12. 8  못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달려야지 싶지만 자꾸 미뤄지고, 마음을 크게 먹어야 나설 수 있는 걸 보면 달리기를 살림이라 꺼내놓을 수 없겠구나 싶기도 하다. 애써 모른척, 마치 어제 본 동무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냥 아무렇지 않게 나가야겠다 마음 먹고 달릴 채비를 갖춘다. 어플을 확인해보니 달린지 20일이 넘었기에 오늘은 더 천천히 달려야겠다 마음 먹고 나섰다. 거리나 속도를 가늠하지 않고 코로만 숨 쉬며 비에 흠뻑 젖는 것처럼 밤공기에 몸을 내맡기며 나아간다. 새삼 나-아-가-다란 낱말을 곱씹게 된다. 달리기를 몸과 마음을 펼치는 자리라 여겨왔기에 '펼치다'란 낱말에 대해선 나름으로 풀이를 해보고 짧게나마 적어보기도 했다. 달리는 동안 드문드문 '나아가다'란 낱말을 떠올리게 되는 때.. 2023. 12. 24.
도둑 러닝(2)_달리기 살림 2021. 10. 27 언제나 그렇듯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가난한 프리랜서들의 공통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이 자기심문적인 질문은 자주 예고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곤 한다. 한창 러닝에 빠져 있을 때 ‘왜 달리는가?’에 대해 자주 묻곤 했는데, 뾰족한 답을 구하진 못했다. 다만 이 메타화의 과정이 피로하지 않았고 다소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즐기는 맘으로 이 질문을 품고 지낼 수 있었는데,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10월의 어느 날, 벌판을 달리던 수만년전의 인류가 떠올랐다. 빠르진 않았지만 그 어떤 동물보다 오래 달릴 수 있던 인류의 뜀박질에 대해서 말이다. 수년전 1일 1식을 하는 동안 허기를 넘어선 ‘텅 빈 상태’가 잠.. 2022. 10. 27.
낭송 러닝 2020. 2. 27 다대포 2020. 2 2월 27일 저녁은 비를 맞으며 달렸다. 흩뿌리는 비여서 곧 그치겠거니 생각하며 달렸는데, 더 거세지진 않았지만 그치지도 않았다. 노면이 미끄러워 평소보다 더 긴장하고 달렸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다대포해수욕장을 돌아 복귀하는 길엔 잠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고 불길한 느낌의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부를 수 있는 구절만 단말마처럼 외쳐되는 형색이었던 터라 고라니 울음소리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괴성’은 지르면서도 곧장 중단하고 싶어진다.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익숙하지만 낯선 목소리와 함께 뛸 수 있다면, 시를 낭송하며 뛴다면? 외우는 시가 없어 곧장 시도 하진 못했지만 복귀하는 길위에선 .. 2020. 3. 8.
달리면서 하는 기도 ​2019. 10. 13​다대포 해변엔 어린 아이들과 어린 부모들로 가득했다. 아이가 없는 이들은 개와 함께 나와 있었다. 아이들보다 개들이 더 활달했고 그건 부모나 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산책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무언가를 키우고 기른다는 건 한 '개체'와 우연한 관계를 이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종'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일요일 늦은 오후, 해변가로 몰려나온 사람들 모두가 오늘만큼은 검게 그을려도 좋다는 관대한 표정이었다. '종'에 관여하고 있는 이들의 자부심과 여유로 해변이 출렁였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잠시 멀미가 날 거 같아 빙글빙글 돌면서 해변를 빠져나와 도로를 향해 뛰었다.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고 내내 뛰었다. 언제나 5분 동안은 더 이상 달릴 .. 2019. 10. 14.
말의 영점, 몸의 영점 2018. 11. 27 유난히 길었던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퇴근한 시간이 10시 반.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구나라는 안도감보다 종일 뭔가 콱 막혀 있는 듯한 갑갑함을 견디는 게 쉽지 않다. 오늘은 종일 수업이 있는 날이고 그건 종일 노심초사 해야 한다는 것. 좀처럼 듣지 않고 끝내 말하지 않는 학생들을 두루 살피며 그럼에도 해야 할 말과 더는 할 수 없는 말들 사이를 줄타기 하듯, 어쩌면 줄다리기를 하듯 용을 쓰다가 탈출하는 마음으로 퇴근한 탓일까.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지만 오늘의 경색만큼은 털어내거나 뚫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말차 한잔을 마신 뒤 달릴 채비를 하고 나선다.  가만 더듬어보면 말의 문제이지 않았던가. 매주 강의실은 말이 죽어나가는 것을 묵묵히 목격해야 하는 참담한 현장이지 않는가. .. 2018. 12. 2.
매일매일 부서지면서 배우는 것 2018. 10. 11저녁 7시에서 8시가 되면 하던 일을 정리해야 한다. 이제는 7시나 8시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체육관에 가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군대 전역 이후로 제대로된 운동을 한번도 하지 않았지만(심지어 나는 군대에서도 족구나 축구를 한적이 없다) 지난 4월부터 거의 하루도 걸르지 않고 체육관을 나가고 있다. 뭔가 그럴 듯한 결심이 서서라기보단 어떤 끝을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조금은 강박적으로 체육관에 나가고 있다. 박사수료생이라는 (민망하고) 불안정한 신분과 1인 가족 생활의 적빈함이 누적된 탓도 없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별안간 꽤 과격한 운동을 시작했고 6개월 간 지속하고 있다.십 수년만에 몸을 쓰다보니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 2018.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