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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낭송 러닝

by 종업원 2020. 3. 8.
2020. 2. 27


다대포 2020. 2


2 27 저녁은 비를 맞으며 달렸다. 흩뿌리는 비여서 그치겠거니 생각하며 달렸는데, 거세지진 않았지만 그치지도 않았다. 노면이 미끄러워 평소보다 긴장하고 달렸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다대포해수욕장을 돌아 복귀하는 길엔 잠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고 불길한 느낌의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부를 있는 구절만 단말마처럼 외쳐되는 형색이었던 터라 고라니 울음소리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괴성 지르면서도 곧장 중단하고 싶어진다.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익숙하지만 낯선 목소리와 함께 있다면, 시를 낭송하며 뛴다면? 외우는 시가 없어 곧장 시도 하진 못했지만 복귀하는 길위에선 내내 상상하며 뛰었다. 그 와중에 권여선의 소설봄밤」 장면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영경은 컵라면과 소주 한병을 비우고 과자 한봉지와 페트 소주와 생수를 사가지고 편의점을 나왔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영경은 소리로 외치며 걸었다.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영경은 작은 모텔 입구에 멈춰 섰다.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갑자기 수환이 보고 싶었다. 오후에 면회를 영선과 영미 생각도 났다. 아이가 살아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 영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촛불 모양의 봉오리를 매단 목련나무 아래에서 그녀는 소리 내어 울었다. 

―권여선봄밤안녕 주정뱅이, 창비, 2016, 33. 


영경 위중한수환 병실에 남겨두고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위해 여관 계단을 오르며 외던 김수영의 봄밤」 아무 것도 가진 없는 이가 존엄을 지키고자 외치는 진군가이면서 이상 무언가를 지킬 힘이 남지 않은 이가 부르는 구슬픈 레퀴엠이었을 테다. 알콜중독자여서만이 아니라 맨정신으론 수환을 떠나보내지 못할 분명했으니, (다시) 취해야 했을 것이다. 요양병원으로 돌아갔을 수환은 병실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영경의 (마지막) 술은 이전의 기억까지 잊을 정도의 독주여야 한다. 소리로 또박또박  봄밤」 구절을 외며 모텔 계단을 오르던 영경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생각했다. 목소리는 중독자의 자조나 변명처럼 보이지만 권여선 소설의 중독자들은 끝내 포기할 없는 하나를 지켜내기 위해중독 선택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증 알콜중독과 간경화, 심각한 영양실조를 앓고 있는 영경과 회복이 불가능한 류머티즘 환자 수환은 요양병원에선알류커플이라 불렸지만 나는 둘을서로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존중했던 사람들 기억한다. 무언가를 끝내 지켜낸다는 화약처럼 아슬아슬”(권여선, 22) 일일 수밖에 없다. 달리며 상상한 낭송이라는 낯선 목소리 리스트에 봄밤」 영경이 생각난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처럼 비오는 도로 위를 달리며 읊 시는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슬아슬하고 위태롭지만 '근사한' 낭송 러닝을 상상하며 빗속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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