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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낯선 고향 쪽으로⏤코로만 숨 쉬기(5)

by 종업원 2023. 12. 24.

2023. 12. 8

세희가 선물한 테이블과 의자, 옆집에서 선물로 주신 말린 오징어, 오에 겐자부로의 신간과 맥주 한 병. 2015년 6월 8일 송도 집.



못해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달려야지 싶지만 자꾸 미뤄지고, 마음을 크게 먹어야 나설 수 있는 걸 보면 달리기를 살림이라 꺼내놓을 수 없겠구나 싶기도 하다. 애써 모른척, 마치 어제 본 동무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냥 아무렇지 않게 나가야겠다 마음 먹고 달릴 채비를 갖춘다. 어플을 확인해보니 달린지 20일이 넘었기에 오늘은 더 천천히 달려야겠다 마음 먹고 나섰다. 거리나 속도를 가늠하지 않고 코로만 숨 쉬며 비에 흠뻑 젖는 것처럼 밤공기에 몸을 내맡기며 나아간다.

새삼 나-아-가-다란 낱말을 곱씹게 된다. 달리기를 몸과 마음을 펼치는 자리라 여겨왔기에 '펼치다'란 낱말에 대해선 나름으로 풀이를 해보고 짧게나마 적어보기도 했다. 달리는 동안 드문드문 '나아가다'란 낱말을 떠올리게 되는 때가 있는데, 여태 가만히 풀어볼 생각을 하지 못한 거 같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엔 '나아가다'를 "앞으로 향하여 가다"라고만 풀이하고 있지만 '그간 해온 일을 이어서 하다'를 바탕뜻으로 가지되, 새롭게 잇는 일이라는 속뜻을 품고 있다 생각한다. '앞'은 방향만이 아니라 때(시간)도 가리킨다. 아직 오지 않은 때(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나아가기 위해선 우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이어서 한다는 게 '꾸준함'을 바탕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움' 없이 나아가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바깥은 낯선 것과 마주칠 수 있는 장소다. 몸 바깥으로, 나(자아) 바깥으로, 생각 바깥으로, 익숙한 것 바깥으로, 둘레 바깥으로 나가는 일. 지금은 이렇게 적바림해둘 수 있겠다. 달리기는 몸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발돋움이다.

달리기가 매번 즐거운 까닭은 낯선 무언가를 향해 발돋움하기 때문이다. 눈에 익은 둘레(동네)도 달리다보면 새롭게 보이고, 오늘 달리며 펼쳐내는 몸 또한 지난번과 같지 않다. 몸을 다독이고 살피며 둘레와 마주한다. 달리는 동안 몸과 둘레를 돌아본다. 달리기는 몸과 둘레를 돌보는 몸짓이기도 하다. 이러니 달리기를 살림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여느 때보다 느긋하게 달리다보니 한번도 가보지 않는 낯선 길로 미끄러지듯 이끌린다. 신장림역에서 낫개역 쪽으로 가지 않고 아랫길로 향해본다. 가다보면 다대포항 맞은편(목재를 쌓아둔 곳)이 나오지 않을까 어림짐작하며 달렸는데, 감천항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처음 달리는 길이지만 코로만 숨 쉬며 느긋하게 달리니 오솔길을 걷는 것처럼 고즈넉하면서도 내내 기운이 솟는다. 쿵쿵 내딛는 발이 둘레를 두드려 깨우고, 깨어난 둘레가 내 등을 밀어준다. 짧은 터널을 지나 모퉁이를 도니 '송도'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가면 송도가 나오려나. 송도는 내게 '회복의 고향' 같은 곳이다. 맺고 이어온 사귐이 모조리 부서졌던 때, 사람들을 피해 숨었던 곳이면서 종일 정처 없이 무작정 걷기만 했던 곳. 바깥을 향해 나아가려 조용히 몸부림치다가 오솔길을 만났고, 회복과 살림이라는 낱말을 품게 되었던 곳이 송도다. 이렇게 달려서 송도 암남공원에 닿는다면 이제는 그곳을 낯선 고향이라 불러야겠구나 싶었다. 

달리며 흘깃 본 도로 표지판에서 생각지도 못한 고향 이름을 본 탓인지 둘레를 가늠하지 못하고 목적지에 닿기만을 바란듯하다. 송도에 닿는다 해도 돌아올 일이 걱정이다. 여느 때와 달리 오늘은 신용카드를 챙기지 못했기에 혹여나 몸이 식어 감기라도 걸릴까봐 지레 걱정이 되는 것이다. 커다란 덤프트럭이 끝없이 이어진 한적한 도로를 지나 모퉁이 몇 개를 도니 이 길로는 송도에 닿을 수 없겠다는 걸 알게 된다. 송도가 아닌 구평동으로 이어진 길이어서 다행이다. 잠시 들뜨게 했던 송도는 다음에 가보자 마음 먹었다. 장림에서 출발해 송도 해변까지 달린 뒤 암남공원을 가로질러 감천항을 거쳐 돌아오면 두어 시간 정도 걸리지 싶다.

느긋하게 달리니 새로운 게 보인다. 한번도 가지 않았던 길로도 선뜻 들어서게 된다. 새롭게 펼쳐진 길 위를 '낯선 고향 쪽으로'라는 낱말을 머금고 달렸다. '낯선'과 '고향'을 나란히 놓아두려면 '바깥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게도 고향이 있다. 거기에 닿기 위해선 나-아-가야 한다. 내가 사는 곳, 억울함과 원망으로 가득한 이 지역을 살아가는 방식이 '바깥으로 나아가며 머물기'라는 걸 다시금 새기게 된다. 

한 시간 가까이 달렸지만 땀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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