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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어3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얼굴'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자신의 출생지가 ‘다리 밑’이나 ‘육교 아래’라는 ‘사실’을 알고 격심한 혼란을 겪던 세대가 있었다. ‘아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설명’할 수 없던 시절, ‘다리 밑’과 ‘육교 아래’는 성교육을 대신할 수 있는 탁월한 구조물이기도 했고 동시에 아이를 길들이는 ‘훈육의 공간’이기도 했다. ‘다리[육교] 밑’에서 아이를 주어왔다는 시쳇말은 인류의 저 오래된 ‘출생 서사’를 변주한 것이겠지만 한편으론 도시의 급속한 인구 팽창 현상으로부터 파생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리[육교]’는 도시의 관문이기도 하고 도시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러니 밖에서 오는 ‘아이’와 ‘유이민’들은 모두 ‘다리[육교] 밑’에서 온 것이지 않을까. 근래 들어 육교가 많이 사라지고 있는.. 2012. 3. 8.
어떤 ‘Kid’의 종언―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의 슬픈 기쁨 대학에 다니던 시절, 내겐 유별난 ‘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책의 서문을 섭렵하는 것이었다. 선배와 선생 없이 오래된 서가를 헤집고 다니며 수많은 책들의 서문을 읽느라 하루를 다 소진하곤 했다. 수줍은 고백으로 채워진 서문은 알 수 없는 문장들로 빼곡한 어려운 책을 친근하게 만들어주었고 비장어린 선언문과 같은 서문을 읽으면 마치 공동 저자라도 되는 냥 함께 달뜨곤 했던 것이다. 책의 서문을 읽으며 마음과 몸이 동뜨는 것은 필시 예비 문사의 허영에 가까운 것이었을 테지만 새로운 세계, 혹은 새로운 말들과의 첫 만남이 주는 설렘과 기쁨만큼은 숨길 수 없는 것! ‘세계의 본문’을 예감하고 직감할 수 있는 교량이기도 했던, 그 시절 읽었던 책의 서문들이야말로 내게 ‘문학적인 것’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 2011. 9. 20.
거울과 사진, 고백과 글쓰기 스무 살이 한참 지난 나이지만 ‘∼씨’보다 ‘∼양’이라 불리기를 원하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틈만 나면 거울을 보고 주변사람들이 진절머리를 칠정도로 열성을 다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고백’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거울 보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사람들 앞에 설 ‘자신감’은 없지만(‘∼씨’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 홀로 서는 것이다. 그/녀와 마주본다는 것이다) ‘자신’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양’이라는 호칭 주변에는 그래도 ‘난 소중해’라는 유아적인 정서가 둘러싸고 있다) 쉼없이 거울을 보고 고백을 하는 그 여성의 손에는 늘 핸드폰이 쥐어져 있다. 영화 (이경미, 2008)는 볼이 빨개지는 콤플렉스를 가진 ‘양미숙’이라는 인물.. 2011. 6.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