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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대항운동의 방아쇠"

by 종업원 2014. 4. 26.


2014. 4. 26


  "원전재해는 사람들을 결합시키기보다는 분리시킵니다. 아무래도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을 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꼭 방사성물질 탓은 아닙니다. 국가 탓입니다. 


  원래 원전을 추진한 것은 국가입니다. 게다가 국가는 원전이 초래한 재앙을 가능한 한 숨기면서 주민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패닉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규탄을 당하고 배상을 요구받는 것이 두려워서입니다. 즉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는 근본적으로 국가가 개입함으로써 생겨나고 악화된 재해에 해당됩니다. 다라서 여기서는 '유토피아'가 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원전재해는 아무리 대형이라고 해도 지진이나 쓰나미에 의한 재해가 가져올 수 없는 무언가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탈원전에의 투쟁이 그러합니다. 탈원전으로의 투쟁은 원전을 만드는 자본=국가가 구축해온 체제를 탈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해 그 자체가 '유토피아'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솔닛의 『재해와 유토피아』에서 시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자연과 인간-『세계사의 구조』보유』(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3), 39~40쪽. 



  '구조'와 '수색'의 사이의 아득한 심연에 빠져 허우적대기를 반복하고 있는 나날. 침잠하고 또 침잠하는 것이 애도의 한 방식일 수는 있겠으나 침잠에 침잠해버리는 일, 바꿔 말해 우울이라는 자아의 감옥에 스스로 유폐되는 시간만큼은 되도록 벗어나야겠고 그런 시도가 별 수 없다면 그 시간만큼은 가능한 줄여야 할 것이다. 그런 침잠이 사유의 장전과 행위의 장전을 위한 시간이었는지, 거두절미하고 지금-이곳에서 사력을 다해 방아쇠를 당기기 위한 애씀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방아쇠를 당긴다는 것.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 나아가는 것이며, 지금-여기를 불태우는 것이다. 공동체의 규약과 규율로부터의 이동. 그러니 격발의 화염은 각성의 불꽃과 다르지 않다. 격발은 또 다른 장전의 연쇄 운동이다. 사유의 이동, 이동의 사유는 방아쇠를 당기기 위한 동력으로 기능해야 한다. 사유가 거대의 자아의 감옥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바깥을 향한 격발의 운동으로 변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옆구르기의 시간. 총탄을 피하기 위한 옆구르기는 동시에 장전을 하는 시간이자 행위이다. 이곳을 불태우고 저곳으로 이동하는 행위로서의 옆구르기. 지면(대지)을 동력으로, 지형·지물에 대한 믿음으로 구르는 짧은 시간. 번개처럼 깜깜한, 장전의 순간, 격발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