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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가난이라는 두 사람

by 종업원 2015. 1. 5.

2015. 1. 4. 


 


 

"코트는 네가 결혼하기 전 나와 함께 시 외곽의 아웃렛에서 예복 대신 구입한 것이다. 돌아오는 내 차 안에서 넌 그렇게 비싼 브랜드의 코트는 처음 입어본다며 천진하게 웃었다. 너의 두 달 치 점심 값 정도 되는 그 코트가 싸구려 원단으로 만든 기획 상품이라고, 입어봐야 별로 따뜻하지도 않을 거라고 차마 네게 말하지 못했다. 너는 폴리에스테르가 3분의 2쯤 섞인 육중한 코트를 입고 추위를 모르는 사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사뿐사뿐 걸어 다녔다. 비싼 옷을 입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자랑처럼 말하는 너, 값싼 옷 따위로 금세 따뜻해지는 네가 부러웠다. 그 무렵 네가 부러웠다. 네가 가진 모든 것들, 네가 가지지 못한 것들, 어느 하나 부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정소현, <너를 닮은 사람>



버스에서 읽다가 밑줄을 치고 급히 당구장 표시를 해둔 대목을 귀가해 돌아와 다시 읽어보았지만 무엇을 기억하고자 그은 밑줄인지, 그 순간 나를 사로잡았던 게 무엇인지 떠올릴 수 없다. 아마도 가난일 것이다. 멀리서도 금방 알아 채고, 흘겨봐도 금새 눈에 들어오는. 집중하고 있지 않아도, 숨가쁜 상황에도 자명하게 알아차리게 되는 가난한 것들. 정소현의 소설집 어디를 펼쳐도 가난이 나온다. 가난의 형색, 가난의 기미, 가난의 기운, 가난의 기억, 가난의 감정, 가난의 관계, 가난에 불들려 있는 가난. 가난은 두 사람을 조건으로 한다. 가난하지 않은 너와 가난한 나가 아니라 가난한 내가 가난한 나를 자꾸만 바라보게 만든다. 그렇게 내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게 된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가장 먼저 내가 나를 측은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의 가난은 언제나 두 사람이다.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며 저기에 있고자 하지만 도리 없이 여기에 있는. 가난은 더러운 얼룩처럼 너무나 빨리 눈에 띄어 재빨리 지워버리거나 치워버려야 하는 것이다. 가난을 금새 알아보는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지켜내지 못한다. 가난의 기억이란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지워버리고 치워버린 것들의 목록, 재빨리 흘려보낸 것들의 목록일 따름이다. 그런 이유로 늘 물끄러미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가난을 부러워하는 '나'의 어떤 정서에 밑줄을 그어두고 싶었던 것일 게다. 싸구려 원단으로 만든 코트를 입고 즐거워하던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으로 지나가버린 어떤 시간을 떠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말끔하게 지워져 있을 그 가난의 얼룩을, 몸을 숙여 땀을 흘리며 닦고 또 닦아 내었을 어떤 애씀과 안간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