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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기

바보야! 문제는 자백이 아니야

by 종업원 2010. 4. 12.




  이별을 통보한 연인에게 이별의 이유를 묻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 그 이유를 알아야만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이별을 부정하기 위한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이별의 이유는 특정한 사건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그것을 이어온 시간들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별을 통보하는 연인에게 그 이유를 묻지 말고 연애의 시간을 다시 떠올려보아야 한다. 그곳에 헤어짐의 이유가 너무나도 선명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범인에게 자백을 종용하는 검찰과 언론의 태도는 이별의 이유를 맹목적으로 묻는, ‘여전히’ 아둔한 연인과 닮아 있다. 자신의 죄를 스스로 진술하게 하는 자백은 결코 범죄의 전말을 설명해내지 못한다. 범죄를 용의자의 자백을 통해 해결하려는 태도는 비단 과학적 수사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백은 범죄의 해결이 아닌 또 다른 범죄를 잉태하는 조건이 되어버리고 마는 보다 복잡한 내용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길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검찰과 언론의 태도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단순화시켜 단박에 해결해버리는지 잘 보여준다. 이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대중들의 분노가 자백에 기대고 있는 범죄수사와 사이좋게 발을 맞추고 있기도 하다. 범죄 사건을 자백을 통해 해결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는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범죄라는 사회적 증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함이다.



  거짓말 탐지기 따위로 용의자의 심리를 알아보는 것이나 자백을 종용하는 태도는 도주하는 범인을 향해 내뱉는 ‘거기서!’라는 허망한 외침과 다르지 않다. 범인의 도주선, 다시 말해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정황들을 미리 파악하지 않는다면 희생자는 반복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고 권력은 그 희생자들을 담보로 사회 구성원들의 정당한 권리를 침탈하는 근거로 활용할 따름이다. 우리 모두가 잠정적인 범죄자이자 희생자가 될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때 통치 체제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고 시민의 권리는 자연스레 국가에 양도되는 것이다.



  헌데,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는가. 모두들 목청은 높여 사형제 부활과 화학적 거세 따위의,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까지 흔쾌히 봉헌하려는 그 목소리들이 ‘소녀 상품’의 열렬한 구매자라는 사실말이다. 그러니 김길태에 대해 분노하는 도덕적인 시민의 위치와 소녀를 성적인 상품으로 구매하는 소비자의 위치가 어떻게 화해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는 답해야 한다. 그것은 필시 그때 소녀는 왜 혼자 집에 있어야만 했는지, 그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는 왜 빈집들로 넘쳐났는지, 왜 어떤 곳은 우범지역이 되고 어떤 이는 범죄자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라는, 아무도 묻지 않았던 이 질문들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부산일보> 2010년 3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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