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업 단상

운동 선수가 마시는 공기(2)

by 종업원 2015. 1. 9.

2015. 1. 9




작년 22일부터 시작한 계절 학기가 끝나간다. 잠깐 쉴 틈도 없이 이어진 수업이라 지난 2학기가 해를 넘어 진행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계절 학기가 꼭 필요한가라는 자문엔 여전히 아니올시다라는 변함없는 자답을 하곤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생산성과 마주하게 되는 보람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규 학기라면 4개월동안 일주일에 한 두번 나가는 수업을 3주라는 짧은 기간동안 매일 같이 나가서 '수업하는 몸'을 유지하고 그 상태를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다는 점을 우선 언급해둘 수 있겠다. 시간 강사 신분으로 16주를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정규 학기란 비정규라는 강사 신분을 매순간 체감하고 또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해서 강단에 서서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행위의 가치를 매번 점검할 수밖에 없는데, 학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 가치의 하락을 실감하게 된다. 


16주간 강의하는 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흐트러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강의를 한다는 행위의 가치를 끊임없이 회의함에 따라 자존감이 심각하게 훼손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배움의 나눔'이나 '대화와 토론을 통한 상호협력적 교류의 장'이라는 수업의 가치는 한낱 낭만에 불과한 것인가, 라는 물음을 거듭 거듭 상기하며 학점을 주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위치에서 비현실적인 낭만으로 치부되는 수업의 가치를 현실화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 회의와 견딤, 모멸과 극복, 좌절과 의욕 사이를 쉴 틈없이 오고가는 데 있어 16주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 것이다. 학기 말에 대면하게 되는 정서가 매주 성실하게 주고 받은 대화의 목록이 차곡차곡 쌓인 성과와 성취가 아닌 쉽게 흩어지고 성급하게 마모되어 소진과 피로의 형상으로 대면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때 무너지는 것은 한 학기동안 담당했던 교과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강사의 몸과 마음이다. 말과 행위의 교류를 통해 길어올릴 수 있는 '희망의 목록'이 거듭 무너지는 것이다.   


계절 학기의 말미에서 내가 느끼는 감각은 무너짐이 아니라 외려 단단함이다. 3주간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강사의 몸과 마음, 그리고 매일매일 일정한 시간동안 만나 나누는 대화를 통해 감각의 교류가 지속되어 차곡차곡 축적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4개월동안 무너졌던 몸과 마음이 3주간의 강의 속에서 회복된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회복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다시금 가지게 된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바스라지기만 하던 '수업이라는 희망'을 다시금 품을 수 있는 기력이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회복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번 계절 학기엔 이례적으로 목포 해양대학교에서 3명의 학생이 수업을 신청하여 그들의 존재가 기묘한 외부성을 발휘해 강의실에 썩 괜찮은 긴장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지난 학기 모 대학의 전공 수업엔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와 현직 소설가가 청강을 한 탓에 16주 내내 단 한순간도 긴장을 놓치 않아 적잖은 성과가 있기도 했다. 타학교 학생이나 성적과 무관한 청강생이 수업에 참여할 때 구성되는 외부성이야말로 어쩌면 수업이라는 교류의 장의 알짬인지도 모른다. 


이번 계절 학기를 진행하면서 한 가지 기억해두고 싶은 게 있다. 며칠 전 한 학생으로부터 생경한 문건을 하나를 받았다. 병가로 인해 결석을 하게 되어 병원 처방전이 적힌 진단서와 함께 '결석 사유서'라는 것을 작성해서 내게 건네는 것이었다. '공결'이라는 것이 그저 공문서 하나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거라 착각하는 풍토와 그 착각을 손쉽게 용인해버리는 분위기 속에서 '공결'이라는 것이 강사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어도 한낱 잔소리로 치부하거나 이죽거리기만 할뿐이라 공문서를 제출하는 학생의 태도에 따라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고 그저 미소로 받아넣기만 하던 차에 손글씨로 작성한 '결석 사유서'가 외려 생경하게 느껴져서 그 문건을 여러 차례 읽어보았다. 병원 진단서만 내도 되는 것을 손글씨로 어제 어떤 이유로 결석을 했는지 간명하게 밝혀놓은 그 글의 반성문조의 어투가 마음에 조금 걸렸지만(결석한 게 잘못은 아니니까) “건강관리도 수업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자세 중 하나인데”라는 이례적인 구절 앞에서 잠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후에 그 학생을 불러 이런 문건을 작성해서 제출하게 된 경위를 넌지시 물어보니 선배로부터 그렇게 배웠다는 것이다. 물론 그 결석 사유서가 '공결'을 위한 행정적인 문건의 의미로 작성한 것일 수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내 고민은 '결석 사유서'의 진정성 유무가 아니다. 그보다 내가 이런 문건에 감동해도 되는가라는 물음을 거듭 할 수밖에 없는 어떤 형편에 있다. 대학의 비정규 시간 강사인 나는 학생들의 말과 행위에 마음껏 감동을 받아도 되는 위치에 있는가? 이 서글픈 물음에 나는 답할 수 없다. 이 치욕스러운 대학 사회 속에서, 그 외로운 강의실에서, 내가, 다름 아닌 비정규 시간 강사의 위치에서, 감동을 받아도 되는가, 그렇게 들떠도 되는가, 그렇게 안심해도 되는가, 그렇게 어떤 믿음과 희망을 거두절미 하고 확신해도 되는가. 이 물음에 즉답할 수 없지만 손글씨로 작성한 '결석 사유서'와 그 속의 구절만큼은 기억될 듯하다. 언젠가 강의실에서 다시 절망하게 될 때 이 '결석 사유서'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내게 묻게 된다. 운동선수처럼 몸과 정신을 관리하고 있는가, 경기장에 들어서는 선수처럼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는가,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함께 뛰는 필드 코치처럼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