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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단상

‘플라자’ 앞에서 외친 ‘플리즈’-어떤 강좌 후기

by 종업원 2015. 6. 5.

2015. 6. 5




강좌 장소가 ‘학생 플라자’라는 문자를 받았음에도 나는 바삐 등교 하는 학생들을 붙잡고 연신 ‘학생 회관’의 위치를 물었다. 그 정도 물었으면 잘못된 위치라도 가르쳐줄만 한데 ‘그곳’을 아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다는 것. 이제 대학엔 ‘학생 회관’ 따위는 없는 것이다. 강좌 시간에 임박해서야 나는 학생 회관이 아닌 학생 플라자를 떠올렸다. ‘플라자’를 앞에 두고 그 앞을 30분동안 헤매었던 것이다. ‘학생 플라자’는 ‘학생’을 위한 것인가, ‘플라자(시장)’을 위한 것인가. 아니 이렇게 물어야 한다. 학생들은 플라자를 원하는가, 회관을 원하는가. 초국적 기업이 학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휘황 찬란한 광고판을 내걸고 버젓이, 맹렬히 영업을 하고 있는 판이니 학생들이 회관보다 플라자를 원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지금 대학이 필요한 것은, 학생들이 욕망하는 것은 각자의 입장과 의견을 공유하는 공적 영역이 아니라 저마다의 상품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스펙’이지 않은가. 플라자 안에 들어서자마자 ‘라식/라섹’ 가능 여부를 알려주겠으니 신청하라는 외침이 달려든다. 플라자를 앞에 두고도 찾지 못한 청맹과니 같은 나 같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만 같아 도망치듯 발걸음을 바삐 옮기게 된다. 


‘플라자’를 앞에 두고 ‘회관’을 찾았다는 것, 그것이 나와 대학 사이의 거리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오늘의 강좌에서 내가 만나게 될 학생들과의 거리쯤 되겠다. 새삼 생경했던 것 하나를 언급해두고 싶다. 표지판만으로 대학 내 건물을 찾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 말이다. 운동장이나 회관을 중심으로 하는 대학 내부에서의 길찾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속되는 (재)건축으로 어쩌면 표지판의 유효기간이 너무나 짧기에 별무소용인지도 모를 일이다. 매번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니 그에 맞춰 표지판을 수정하는 것 또한 많은 비용이 들 터, 차라리 표지판을 최소화하는 게 실용적인 일이라 판단하고 있나보다. 표지판만으로 대학 내에서 길찾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은 대학이 외부자에게 개방된 곳이 아니라 내부자에게만 허락되는 제한된 장소임을 넌지시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대학의 중앙도서관이 오직 재학생들만이 출입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뀐지도 오래이니 대학 사회의 고립과 폐쇄성을 다시금 곱씹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플라자를 앞에 두고도 내내 ‘회관’만을 찾아댄 사람이 진행하는 것이니 오늘의 강좌의 엇갈림이 어느 정도일지 그 짧은 허둥댐 속의 헤맴이 사실상 거의 다 보여준 것이나 다름 없겠다. ‘여성커리어센터’에서 진행하는 기획 강좌에 급히 섭외가 되어 100분 가량을 소화해야 하는 강좌를 준비해야 했다. 나는 ‘구조 조정의 시대에서 구조 요청의 시대로’라는 제목의 강좌를 준비했는데, 홀로 어떤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는 책임 속에서 고민하고 있던 주제에 서둘러 뼈대를 잡고 살을 붙여 본 것이었다. 나는 몇 주 전 ‘구조 조정’이 ‘구조 요청’의 다른 말임을 깨단하게 되었는데 이 당연한 이치를 그간 새기고 있지 못했다는 점이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구조 조정이라는 이 유연한 살생부가 ‘구조’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들의 ‘사고의 구조’ 또한 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구조가 조정하는 사고의 조정은 구조 요청을 듣지 못하게 관계의 방음처리를 하는 것, 이질적인 목소리를 살균처리하는 것, 그렇게 살처분한 사체(死體/思體)들을 남김없이 파묻어버리고 그 주변을 바리케이트로 둘러 세우는 일일 테다. 구조 조정의 시대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 요청을 들을 수 있을 때, 바꿔 말해 응답(책임 responsibility) 할 수 있을 때 절연되었던 관계를 구해낼 수 있다는 것이 이 강좌의 골자라고 할 수 있다. 오전 내내 ‘플라자(plazza)’에서 ‘플리즈(please)’를 외치고 있었던 형국이니 그 구조 요청이 전달될 리 만무하다. 구성원들을 ‘고립’시키는 구조 조정의 논리 속에서 구조 요청에 응답함으로써 친구와 동료를 곁에 두는 일, 그것이 ‘독립’의 조건일 수 있음을 피력하고 싶었으나 정작 구조 요청이 필요한 건 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적지에서 배운다’거나 ‘강의는 슬프다’는 뜻깊은 권면을 아무리 되새겨본들 ‘적지’는 배움은 커녕 영혼까지 지치게 만들기 일쑤고, 원인을 파악하기 힘든 슬픔이 이스트처럼 부풀어 올라 졸지에 그 안에 갇혀 고립될 지경이다. 휴대폰을 꼭 쥐고 강의실을 나가는 학생은 왜 그리 많으며 다만 가만히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이는 또 얼마나 많으며, 강의를 시작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졸고 있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구조 조정을 구조 요청으로 바꿔 읽음으로써 고립이 아닌 독립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 ‘이론’이나 추상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생활과 일상’ 속에서, 지금 이곳에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임을 알리고자 내가 제시한 것은 ‘배움’이었다. 멘토링과 같은 일방향적인 정보 전달이 아니라 주고받음으로써 변화하고 생성할 수 있는 배움, 마치 축구의 패스(pass)처럼 함께 달리면서 창조해가는 수평적 배움, 독점이 아니라 옆으로 건네 줄 때 더 풍부하게 되는 나눔은 훗날로 유예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있는 동료들과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임을 전달하고자 했으나 그 말을 강변하고 있는 나부터 그라운드에서 고립되어 있는 형국이라고 할까, 중뿔나게 홀로 개인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까. 아무도 패스를 받아주지 않는 그라운드에서 기운을 주고받는 일이 마음으로 되는 일은 아닐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시계가 없었음에도 90분 정도를 ‘외로운 원맨쇼’로 채울 수 있었다는 것이고 가까스로 나온 두 개의 질문에 응답할 수 있었다는 점정도겠다. 


지금 출강하고 있는 대학의 수강생들이 얼마나 각고의 노력으로 강의에 임하고 있는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된다.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라 차라리 그 다행이 예외적인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가장 오랫동안 강의를 이어가고 있는 대학에서의 수업만큼은 열심을 다해 하고 있다. 4시간 강의를 하고 나면 뭉쳤던 몸이 개운해질정도로 남김없이 쏟아부을 수 있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것임을 새기게 된다. 강의실에게 시도하고 있는 무리한 패스(pass)를 열심을 다해 받아주고 있는 학생들이 새삼 애틋하게 다가온다. 언제까지인지 알 순 없지만 이후 내가 만나야 할 강의와 강좌가 어떤 모습일지 예감하고 또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대응 가능한 방식을 개발하기보단 영혼까지 피로해지는 원맨쇼는 가능한 지양하고 현명하게 피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에 더 집중할 것 같기는 하다. 강좌가 짧은 시간 안에 소비자(!)들에게 뭔가를 건네야 하는 테드(ted)류의 간명한 프리젠테이션이나 즐거움을 줘야 하는 스텐딩 코미디이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학생 플라자에서 강좌를 마치고 홀로 돌아가는 주례의 가파르고 긴 내리막길에서 대낮임에도 사람을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참 야속한 우연이기도 하다. 그 뒷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채플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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