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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패배의 어떤 정직함

by 종업원 2015. 2. 10.

2015. 2. 9

 

 

 

1.

5일을 내내 앓았다. 근육통과 두통 속에서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미역국을 끓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겨우 일어나 미역국을 끓였다. 국물을 먹지 않는 식습관 탓에 국요리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미역국만큼은 먹어둬야 하는 요긴한 국이라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터라 미역을 불린 후 참기름에 볶고 냉장고를 뒤져 활용할 수 있는 재료들을 넣어 10여분을 끓였다. 미역국을 한 그릇 비우고 누웠던 몸을 일으켜 세워 앉은 채로 하루를 버텼다. 정신적인 외상을 겪는 일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몸이 반응을 한다. 정신이든, 말이든 비규정직인 흐름이 물화하는 장소가 결국 '몸'일테니 꼬박 5일간 누워 지낸 시간 속에서 하나의 선명한 사실만이 오롯하다. 몸의 한계, 몸의 패배. 나는 이 패배를 몸과 정신의 일치라는 말로 애써 정당화 하거나 미화하고 싶진 않다. 다만 이 패배 속에 어떤 정직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직함이라니, 그런 건 증명할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새삼 내 삶 속에 보편적이고 증명가능한 것들이 급격하게 줄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자아 밖으로 나가보려고 애쓸 때만 징벌처럼 도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몸의 패배 속에서 명징한 정직함이란 어떤 '도리(道理)'와 관련된 것이다. 행하는 것외엔 도리 없는 것 말이다.

 

 

 

2.

여전히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귐 속에 언제나 '배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년 전부터 애를 써왔던 관계들이 허망하게 흩어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관계가 내 힘만으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내가 참고 견디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야말로 허영이자 오만함임을 알아가게 되는 시간. 다만 이 패배의 시간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으로, 그런 냉소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버티는 데 애를 써볼 뿐이다. 물론 이 애씀 또한 기록될 수 없고 공유하기도 힘든 성질의 것이다. 말하자면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서 미역국 한 그릇을 끓이는 힘처럼 보잘 것 없는 일상이지만 사력을 다해 힘을 낼 때만 가능한 것과 같은 것 말이다. 

 

아득바득 숱한 한계들을 극복하고자 꽤나 긴 시간을 보내온 거 같다. 나는 그 시간을 부정하거나 폄훼하고 싶지 않다. 그 시간은 나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당시 맺고 있던 관계 속에서 함께 마주했던 한계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뚫고 나가려는 의지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면의 방식과 의지는 각각 달랐다고 생각한다. 한계를 극복하고 이겨냈다고 생각하는 경험이 많아질수록 역설적으로 환경과 조건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군분투 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삶의 조건을 인지하고 구조 바깥으로 나가는 동력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지금의 상황을 정당화하고 애씀에 대한 인정의 욕구로 회귀해버린다는 것 말이다. 고군분투의 도가니 속에 자기기만의 함정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 패배를 모르던 시간, 패배를 마주하지 않으려 했던 시간.

 

 

 

3.

한계를 '인정(accept)'하는 것이 한계의 정당화라는 자기화의 논리로 기울어질 수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미약한 차이에 불과하겠지만 한계를 '인지(recognize)'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생각해볼 따름이다. 그것은 한계의 환경과 조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고군분투라는 '훈장'으로 그것을 가리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애씀의 '상처'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 그리고 미약하지만 할 수 있는 바를 하나씩 해보는 것. 한계란 단박에 넘을 수 있는 장벽 같은 게 아니라 두께를 알 수 없는 벽과 같은 것이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당장의 패배를 외면하지 않고 마주볼 수 있을 때 기대하고 계획했던 성취가 아니라 생각지 못했던 행위나 사고를 만나게 된다. 그 행위와 사고라는 것은 워낙 미미한 것이어서 공론화할 수도, 객관화 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한계를 인지하고, 패배를 마주하지 않는 한 결코 알 수 없는 밀도와 강도 속에서만 길어올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한 알의 열매와도 같은 것.

  

이 패배의 정직함이 ‘정신승리’와 같은 말로 쉽게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적어도 어떤 애씀이, 어떤 정직함이 그런 저잣거리의 말로 쉽게 오염되는 것만큼은 나서서 방어하고 싶다. 몸이 속절없이 무너졌던 5일 동안 내가 알게 된 것이라곤 이것이 온전한 나의 패배이자 내 몸의 패배라는 것이다. 다만 정직함이라는 형용사 하나를 얻었을 뿐이다. 증명할 수도 나눌 수도 없는 패배의 어떤 정직함 말이다. 내밀함의 더께가 조금 쌓였을 따름이다. 미역국 한 그릇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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