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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무릅쓴 얼굴-절망하기(3)

by 종업원 2015. 4. 14.

2015. 4. 14




“역사는 군대가 아니다. 그것은 서둘러 옆걸음 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 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을 깨뜨리는 지진이다. 때때로 한 사람이 어떤 운동의 영감이 되거나 그 사람의 말이 몇십 년 뒤 그렇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는 열정적인 몇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때때로 그들이 거대한 운동을 촉발하여 몇백만이 참여하게된다. 그리고 때때로 그 몇백만을 똑같은 분노나 똑같은 이상이 뒤흔들면, 변화는 마치 날씨가 바뀌듯 우리를 덮친다. 이런 변화들의 공통점은 상상에서, 희망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도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미래에, 당신의 욕망에, 열린 가슴과 불확실성이 암울함과 안정보다 나을 가능성에 거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산다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에, 희망하는 것은 두려움의 반대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희망이란 운이 좋다고 느끼며 소파에 앉아 움켜쥐어 보는 복권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희망이란 응급상황에서 문을 부서뜨리는 데 쓰는 도끼와 같은 것이고, 희망이 우리를 문밖으로 밀쳐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전쟁으로부터, 그리고 지구가 지닌 소중한 것들이 멸절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짓밟히는 상황으로부터 미래를 벗어나게 하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약속되거나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희망은 행동을 요구하고 행동은 희망 없이는 불가능하다. 1930년대에 쓴 희망에 관한 자신의 대저서 초입에서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렇게 썼다. “이 정서의 작동은 변화하고 있는 것 속으로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던지는 사람들을 요청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변화하고 있는 것에 속한다.” 희망한다는 것은 미래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고, 미래에 대한 그러한 헌신이 현재를 살 말한 것으로 만든다.“

―레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설준규 옮김, 창비, 2006, 16~18쪽. 



거침없이 진군하여 서둘러 정복해버리는 군대가 아닌, 자꾸만 옆으로 비켜서는 탓에 목적지까지 당도하지 못할 것만 같은 ‘옆걸음 치는 게’들의 움직임이, 돌진이라는 직진 방향(운동)이 아니라 옆걸음이라는 수평 방향(운동)으로, 우열 없이, 뒤쳐짐 없이, 언제라도 합류할 수 있는 연대의 진영을 만든다. ‘때때로’, ‘몇 사람’을 통해서만 겨우 드러나는 애씀은 우리 곁에 밝은 희망의 모습이 아닌 어두운 절망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겁쟁이들(도미야마 이치로)의 얼굴로 우리를 돌아볼 것이다. 그런데 겁쟁이의 얼굴로 서로를 향해 돌아보기 위해선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닌 위험을 무릅써야만 한다. 겁쟁이의 얼굴로 서로를 마주할 때 우리가 보는 것은 못났고 무능하며 절망적인 표정이 아니라 기꺼이 위험을 감내하며 서로를 향해 돌아보는 ‘무릅쓴 얼굴’이다. 저 자신의 얼굴만이 아닌 무릅쓴 얼굴, 그대로 상처(타자)를 뒤덮어쓴 얼굴, 서둘러 빛을 향해 나가지 않고 차가운 어둠 속에 머물기를 선택한 얼굴. 


그 얼굴이 지금 희생자의 얼굴을 뒤집어쓴 유가족의 얼굴로 우리 앞에 당도해 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침몰의 시간에 머물러, 버티고 있는 이들의 얼굴. 유가족들에게 희생의 시간에 머문다는 것은 구조하지 못한 비통의 시간을 머금는다는 것이며, 손뻗어 잡지 못한 안타까움과 무능을 이빨로라도 물고 붙들어 버틴다는 것이리라. 유가족들의 얼굴은 희생자들의 얼굴을 무릅쓴 얼굴이다. 구조하지 못한 이 사회의 무능까지 기꺼이 무릅쓴 얼굴이다. 당당함이 아닌 부끄러움으로, 희망이 아닌 절망으로, 결기한 자가 아닌 겁쟁이의 얼굴을 무릅쓴 얼굴이 우리를 향해 돌아볼 때, 사건의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기꺼이 그쪽으로 몸과 마음을 기울어 그곳에 닿고자 하는 얼굴로, 할 수만 있다면 희생자와 유가족의 얼굴을 무릅쓰고자 하는 얼굴로 마주봐야 한다. 그러니 그 얼굴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겁쟁이의 얼굴은 못난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내하고 고통을 견디고 있는 이들의 ‘공통 얼굴’이다. 겁쟁이의 얼굴은 차곡차곡 겹치고 쌓여 붕괴된 대지의 표면을 뒤집으며, 다른 표정으로 뒤덮으며 천천히 도착할 것이다. ‘나’의 얼굴과 예정된 희망을 내던져 ‘타자’의 얼굴과 절망의 시간을 무릅쓸 때, 함께 이 악물고 머금어 침몰한 2014년 4월 16일에 머물 수 있을 때, 겁쟁이라는 공통의 얼굴은 때때로 “응급상황에서 문을 부서뜨리는 데 쓰는 도끼”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후의 시간은, 다른 시간은 오직 침몰한 2014년 4월 16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옆걸음 치는 게의 걸음으로 4월 16일을 둘러싸야 한다. 함께 머금고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렇게 침몰한 그 시간을 함께 인양(引揚)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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