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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단 한번의 계시

by 종업원 2015. 4. 21.

2015. 4. 20

 

 

         

 

 

키마이라는 그때 한 번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술을 걸고 받는 자가 동일 인물이라도 신체의 자세가 다르고, 대응 방식이 다르고, 운동 속도가 다르면 '같은 키마이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기일회의, 그 순간에 태어났다 사라지는 일회성의 생명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버릇'을 가진 것인지, 어떠한 '기능'을 갖춘 것인지, 어느 정도의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인지 사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 그 같은 일회성의 생명체로 한순간을 살았던 경험을 소급적으로 회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이지요."

―우치다 타츠루,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박재현 옮김, 샘터, 2015, 156쪽)

 

 

1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마이라(Chimira)는 반인반수인 티폰과 에드키나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이다.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는 '나'와 '상대'의 만남이 아닌 '만남 그 자체'를 키마이라의 신체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그 신체란 나와 상대를 동시에 포함하는 '복합적 협동신체’를 가리킨다. 우치다 타츠루에게 ‘복합적 협동신체’는 ‘약함의 무도술’이며 ‘타자의 철학론’이자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협력으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 당도하게 되는 ‘수업론’이다.

 

 

2

단 한번만 허락되는 순간이란 ‘나’를 넘어선 경험의 다른 말이다. 그것은 내가 거인처럼 부풀려져 한없이 커지는 상상의 순간이 아니라 차라리 나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라 해야 한다. 이렇게 변주해볼 수도 있겠다. 단 한번만 읽을 수 있는 문장이 있다. 단 한번만 쓸 수 있는 문장이 있다. 단 한번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단 한번의 순간이란 나 아닌 다른 것/이의 도움을 받을 때를 가리킨다. 다시 읽는다고, 다시 쓴다고, 다시 만난다고 그 순간을 반복할 수는 없다. 모든 도움은 반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돕는다는 것은 모르고 한다는 것이며 그런 이유로 시혜나 동정과는 다르다. 알고서는 도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도움을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도 없다. 도움은 오직 ‘내맡김’ 속에서만 도착 한다.

 

 

3

오직 단 한번의 순간만이 허락되는 관계의 조건 속에서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석 류영모는 살아온 날의 횟수를 연(年)이 아닌 날(日)로 헤아렸다. 그는 하루를 일생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 류영모의 호인 다석(多夕)을 새삼 다시 새기게 된다. 多는 저녁 위에 저녁을 얹힌 형상을 하고 있다. 아침이 아닌 저녁의 얹힘이 '다시', '다음'을 허락한다. 다(多)는 많음이라는 수량을 가리키는 글자가 아니다. 매일매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죽음에서 깨어나 참삶을 살 수 있는 하루가 열린다. 순간을 산다는 것이란 죽음을 산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매일 죽음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4

하루 하루는, 단 한번의 순간은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더할 수도 없다. 오직 한번만 허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은 오직 한번만 허락되는 읽기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오직 한번만 허락되는 문장이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이와는 오직 한번만 허락되는 만남이다. 오늘 내게 도착한 것을 계시(啓示)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내맡길 수 있는가, 내맡김 속에서 응답할 수 있는가, 순간만 허락된 상황 속에서 도울 수 있는가,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는가, 그렇게 죽음을 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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