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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녹아내리는 고리

by 종업원 2015. 5. 26.

2015. 5. 26




“저의 내면에는 굉장히 부화뇌동하는 성향이 있어요. 천성적으로 영향을 쉽게 받고 심하게 받는 사람, 특히 집단적인 것에 잘 휘둘리는 사람입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독일 청년 스무 명이 제 앞에서 나치스의 노래를 합창 한다면 제 영혼은 일부나마 당장 나치스가 될 거예요. 이건 아주 큰 약점이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타고난 약점을 붙잡고 싸워봤자 쓸모없는 일이겠지요. 의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마치 약점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약점을 파악하고, 신중하게 고려하고, 잘 사용하고자 노력해야 하지요. 그런 약점도 모두 좋게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 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 2015, 27~28쪽. 



1942년 1월 19일,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의지하고 있던 신부 페렝에게 보내는 시몬 베유의 편지 한 대목을 옮겨 적는다. 평생을 ‘수난(기름) 받은(부은) 자’처럼 살았던 이 이방인의 삶은 활활 타올라 높은 곳으로 비상하는 것이 아닌 녹아들어 아래로 허물어지는 것이었으며 바닥으로 스미는 일이었다. 혜택 받지 못하는 이들 곁으로 가 끝없이 녹아내리고자 했던 시몬 베유를 잘 알았던 한 친구의 증언을 곱씹어 본다. “시몬이 계속 뉴욕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흑인 여자가 다 됐겠지요!” 자책과 책망 속에서 돌이킬 수 없이 드러나 있는 나의 약점이 관계의 단절이 아닌 관계의 고리로 녹아내릴 수 있을지 자문하게 된다. 그것은 동시에 상대의 약점을, 관계의 약점을 관계의 고리로 삼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약점을 파악하고, 신중하고 고려하여, 잘 사용하고자 노력하는 일’, 매번 마주하게 되는 약점을 모두에게 좋게 쓰일 수 있게 애쓰는 일. 단단한 결속의 고리가 아니라 녹아내리는 고리에 대해 거듭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의 자리가 비추는 하나의 문장. “어디에나 녹아드는 능력은 결국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다는 뜻이죠.”(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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