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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용

"언니야"

by 종업원 2015. 5. 31.

2015. 5. 31



"언니야. 나 월급 만 이천 칠백 이십원 탔어. 홍자네 4천원은 내가 인옥이네집에 가는 길에 가져다 줄게. 남은 돈 4천원은 여기 있어. 책가방 천원, 신발 5백원, 노트 백원, 양말 2백 50원, 인형 2백원, 외상값 34원, 봉투 50원, 내가 쓴 것은 이상이야. 인옥이네서 자고 내일 올게. 월요일부터 출근하래."

―석정남, 1976년 3월 5일 일기, 「불타는 눈물」, 《대화》 1976. 10월.



석정남은 불꺼진 방에 들어서며 자신의 동생 이름을 부른다. '정숙아, 정숙아!' 방에 들어와 불을 켜보니 정숙이의 메모가 있다. 어디 갈 때는 반드시 메모를 해놓고 가라고 언니의 한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동생 정숙이 언니에게 남긴 메모를 석정남은 자신의 일기장에 다시 옮겨 적었다. 그렇게 옮겨 적은 메모가 월간지에 옮겨져 실린다. 석정남이 일기장에 옮겨적은 동생의 메모를 이곳에 다시 옮겨 쓴다. 


별 내용이 없는 동생의 메모를 일기장에 옮겨 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옮겨 쓴다는 것은 매만진다는 것이다. 메모지에 눌러썼을 동생의 손길을 언니 정남은 자신의 일기장에 옮겨 쓰며 여리고 착한 동생 정숙을 어루만졌을 것이다.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다 없어져버려 '월급날이 올까 두렵다'(1976년 3월 9일 일기)는 생각까지 들게 되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 동생의 손을 한번도 어루만져주지 못했을 것이다. 언니 정남은 동생 정숙의 메모를 자신의 일기장에 옮겨적으며 동생의 손길을 겨우 어루만진다. 오늘의 일기장은 어루만짐의 장소다. 


가난하고 낮은 숫자들, 빌린 돈과 몇번을 고민했다가 샀을 품목들을 하나 하나 적어내려 갔을 동생 정남의 손길을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 액수들을 고스란히 다시 옮겨 적고 있는 석정남에겐 저 미약한 목록들이 삶의 중요한 숫자였을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 같은 어휘가 누군가에겐 절실한 목록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활을 옮겨 적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간직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월급날이건만 자신의 월급 전부를 언니에게 건네는 동생 정숙이 메모에 적은 '언니야'라는 부름이 언니 정남에겐 동생의 어루만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다정한 메모의 첫 구절이 언제나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말, '언니야'를 속으로 되뇌며 오늘 옮겨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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