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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글쓰기

누군가의 편에 서서(1)

by 종업원 2015. 7. 30.

  2015. 6. 23

 

 

 

익명의 액자공들

누군가의 글을 읽는 시간, 독자가 되는 시간. 나는 알고 있다. 독자의 시간이란 액자를 만드는 시간임을. ‘읽기’란 작은 액자를 만들어 그 글을 어딘가에 걸어두는 일이다. 수많은 작가들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액자공’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액자가 만들어지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고도 무언가를 감싸고 들어 올리는 노동이 계속되고 있다. 한 명의 작가가, 하나의 작품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들이 그 작가와 작품을 울타리처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어 부를 수 없는 액자공을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인가. 그 익명의 이름들이 작가와 작품의 이름 안에 감춰져 있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두 사람을 부르는 일일 수밖에 없다. 하나가, 한 사람이 무한해질 수 있는 것은 우리 곁에 이름 없는 익명의 액자공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를 들어 올리고 있는 이, 세상의 독자들, 액자공들, 그 경이로운 힘들.

 

 

 

독자-연금술사

독자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편에 서는 일이다. 모든 읽기가 행위의 끝이 아닌 시작이듯이 누군가의 편에 서 있는 그 자리가 독자의 최종 목적지일 수는 없다. 읽기란 바로 이곳에서 시작하겠다는 수락을 조건으로 한다. 그것은 독자라는 이름으로 글에 익명의 무게를 더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모든 읽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기울어진 상태에서 시작하겠다는 것, 그것이 독자의 걸음이며 결기다. 이 결기는 맹목적인 지지와는 다르다. 무작정 한쪽에 붙박고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진 상태에서 애를 쓰겠다는 것이다. 어떤 애씀인가. 한쪽 편에 서서 바라보면서도 편향되지 않고 길을 잃지 않으려는 애씀이며 기꺼이 마이너스 상태에서 시작하겠다는 애씀이다. 때로는 버텨냄으로, 때로는 힘겹게 거슬러 오르는 노동으로 함께 있는 것. 말하자면 독자가 된다는 것은 짐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일이다. 기꺼이 짊어진 짐과 기울어진 상태를 의욕의 밑천이자 추동력으로 바꾸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읽는 사람이며 독자(獨自/讀者)다.

 

 

 

독자-노트

독자는 쓰지 않음으로써 ‘쓰는 행위’에 깊이 관여한다. 곁에 독자가 있다는 것은 ‘노트’가 있다는 것이다[‘노트’에 관한 영감은 ‘우정의 외면’ 전시 중 <물-숨->(박경효, 은주, 송진희, 스카웨이커스 공동 작품)에서 박경효 작가 따님이 자신의 엄마를 언급 하면서 한 말(“엄마는 내 노트 같아”)에서부터 연유한 것임을 밝혀둔다]. 썼다가 지워도 좋고 쓰다 말아도 괜찮은 노트가 곁에 있을 때 아직 ‘문장’이 되지 못한 감정과 정서가,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 이유로 그 노트는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는 내밀한 교환 일기장만이 아니라 ‘아직 시도되지 않았고, 알려지지 않은 그 무언가’가 한 사람에 기대어 나타날 수 있는 영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계시(啓示)의 노트. 계시는 기다린다고 도착하는 것이 아니며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내맡김 속에서만 불현듯 도착하는 어떤 말-씀이 계시다. 분명히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말’이 씌어질 수 있는 장소가 ‘독자라는 노트’다. 말을 읽는 사람, 말을 받는 사람, 말을 들어 올리는 사람. 독자는 이곳에서 말을 받치고 들어 올리는 사람이다. 땅 위(紙/地面)에 계시(‘말씀’)가 도착할 수 있게 버티며 기다리는 이. 지금 읽고 있는 이는 이 땅을 일구며 비옥함의 세계를 지키는 이이기도 하다.

 

 

 

 

<생활-글-쓰기 모임> 1회_광복동 <잠> 게스트 하우스_2015.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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