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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도둑 러닝(1)

by 종업원 2022. 10. 27.

2021. 4. 20

 

미루고 미루다가, 며칠을 벼르고 벼르다가 나왔다. 날이 많이 따뜻해져서 반바지를 입고 달렸다. 미루고 미룬 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주치의라고 생각하는 한의원 선생님의 ‘땀을 흘리면 안 된다’는 단호한 처방을 어길 수가 없어서인데, 이성과 상식으론 납득이 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다. 러닝을 하면 아무래도 건강해지니 뛰고나면 좋다는 게 ‘상식’이지만 내 경우엔 달리고나면 건강을 걱정해야 할 판이니 이 속앓이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달리기는 일탈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난 겨울, 달리는 동안 자꾸만 오정희의 <야행>을 떠올렸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에 공을 들이고 있어서 대개 밤 10-11시쯤에 달렸던 것과 달리 저녁 7-8시엔 나설 준비를 해야 하니 한번 달리려면 일탈의 결심과 함께 종일 준비를 해야 한다. 분주하게 이것저것 챙기는 오전(하지 않아도 그만이고 해도 그만인 일들인데, 내 생활의 정수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허둥지둥 펼쳐보고 이것저것 떠오르는대로 메모하는 오후를 지나다보면 저녁엔 작은 성과라도 만들어내야 하지 않나라는 자책을 하게 되는데, 그런 상태에서 일탈까지 결심하는 건 참으로 쉽지가 않다. 

맘편히, 마음껏 달릴 수 없지만, 그래도 달린다. 달리면서 달리고 싶은 이유와 달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팽팽하게 맞서는 상태가 꼭 이 경우에만 국한되는 건 아님을 알게 된다. 써야 하는 이유와 쓸 수 없는 이유, 만나야 하는 이유와 만날 수 없는 이유, 기획을 해야 하는 이유와 할 수 없는 이유…. 누가 시킨 적 없고,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닌 경우가 태반인 것들이라 언제라도 자기변명이나 자기모멸이 될 수 있는 이 갈등 구조가 내 삶을 장악하고 있지 않나, 어쩌면 그것이 나를 살게한 동력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달렸다. 팽팽하던 긴장 관계가 풀리면 애써 버텨온 시간이 무색할만큼 폭주해버리는 경우가 잦은데, 마치 그런 심정으로 조금 더 빨리 달려보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승강기를 기다리다 거울을 들여다보았는데, 검붉게 상기된 얼굴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차마 더 들여다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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