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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각자의 '짐승' 일기

by '작은숲' 2022. 10. 29.

2022. 10. 29

 

김지승의 『짐승일기』는 ‘쓸 수 없는 것들’을 쓰려고 하는 의지로 가득합니다. 날짜가 아닌 요일로 재편집되면서 선형적인 시간성이 흐트러지고 사건과 감정의 희미한 인과도 지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읽을수록 감정과 사건이 누적되는 게 아닌 어딘가로 휘발되어버리는 특이한 읽기 체험을 하게 됩니다. 형용모순이지만(무엇보다 수사적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짐승일기』를 읽으면서 내내 ‘지우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걸 지우는 게 아니라 ‘어떤 것들’을 지워가는 글쓰기 말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의 글쓰기 속에도 ‘어떤 것들을 지우기 위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잊지 않으려 무언가를 기록하려고 할 때조차, ‘남겨두려는 의지’가 기어코 서 있으려는 자리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치욕을 쓴다고 할 때, 굴욕을 쓴다고 할 때, 비참을 쓴다고 할 때, 아픔을 쓴다고 할 때, 슬픔을 쓴다고 할 때, 우리는 별 수 없이 치욕 위에, 굴욕 위에, 비참 위에, 아픔 위에, 슬픔 위에 서야 합니다. 회피하고 싶은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새겨진 글자를 지울 수 없으니 그 위에 또 다른 글자를 덧쓸 수밖에 없습니다. 깨끗한 종이 위엔 쓸 수 없는 글, 오직 덧쓰는 것을 통해서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을 거에요. 그래서 잘 알아볼 수 없는 글, 누더기가 되는 글, 무언가를 지우면서 새겨지는 글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써보진’ 않았지만(달리 말해 그 비참 위에 ‘서보지’ 않았지만), 쓰고 싶은(다시 말해 지우고 싶은) 글이 있지 않을까 해요. 

『짐승일기』에서 ‘짐승’은 거칠고 야생이라는 의미만을 가지는 건 아닐 거에요. ‘짐승’은 ‘일기’를 잡아먹는 힘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인간적인 것을 집어삼키는 힘을 가리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무언가를 남기려는 의지와 무언가를 집어삼키려는 의지가 붙어 있는 이름, 쓸 수 없는 것을 쓰려는 의지, 지우는 글쓰기. 시간이 정지되고, 관계가 끊어지고, 내가 알던 모든 공간이 사라져버린 시간. 그걸 저마다의 ‘격리 기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어쩌면 그 격리 기간 동안에만 각자의 ‘짐승일기’(지우는 글쓰기)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89회 <문학의 곳간>에선 각자의 ‘짐승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으면 합니다. 한번도 쓰지 않은/못한 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는 것도 좋겠고, 한때 조금이나마 써봤던 (짐승)일기 이야기를 공유해주셔도 좋습니다.

 

89회 <문학의 곳간> 사귐 시간 주제_부산 중앙동 스튜디오 <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