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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곳간

그 사람의 말(투)

by 종업원 2023. 1. 9.

2020. 6. 27


권여선의 새 소설집엔 늙은 레즈비언의 (희박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희박한 마음>이란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소설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 미묘한 고갯짓은 오로지 디엔만이 할 수 있었고 그런 모습으로 사진에 찍힌 적도 없으니 그것은 디엔과 더불어 영영 사라져버렸다.”(91~92쪽)

 

오래전에 곁을 떠난 연인의 ‘고갯짓’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서명일 것입니다. ‘디엔’의 그 서명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연인이었던 ‘데런’밖에 없겠지요. 연인이란 그렇게 오직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겠습니다. 마음의 모국어라고 할까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던 이가 떠나버리면 (마음의) 모어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버려 내내 외국인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디엔의 꿈을 복기하는 데 골몰하느라 데런은 고인 침이 흘러내리는 것도 몰랐다.”(98쪽) 권여선의 소설엔 아무리 쫓아도 가닿을 수 없는 세계가 변주되어 나타납니다. 이건 불행의 다양한 판본을 말한다기보다 ‘희박한 언어(마음)’를 공유했던 꽃 같은 시절이 있었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번 소설집에도  권여선 특유의 말장난이나 단어의 발음과 함께 연상작용으로 이어지는 대목이 소설 곳곳에 등장합니다. 소설 <재>의 경우엔 ‘둥둥’이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표현 속에 소설 전체의 정서가 집약되어 있기도 하죠. 요즘은 말투나 자주 쓰는 단어를 통해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드물긴 합니다만(‘대박’이란 말이 게걸스럽게 많은 말과 표현을 먹어치워버렸죠!), 권여선의 소설을 통해서 그간 만나거나 스쳐갔던 사람들의 ‘말’을 기억해보았으면 합니다. 

오래전 <문학의 곳간>엔 오랜만에 만날 때면 ‘울듯이’ 반가움을 표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울듯이 인사하던 그 말투엔 타인과 함께 마음껏 기뻐하고 반가워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홀로 생각하게 됩니다. 가끔 그 친구의 울듯이 반가워하던 말투가 생각납니다. 제대로 맞장구 쳐주었던 적이 없지만 말입니다. 돌아보니 주변엔 더 이상 그렇게 울듯이 반가워하는 사람은 없군요. 66회 <문학의 곳간>에선 그간 만나고 사귀었던 사람들이 남긴 말(투)을 나누어보았으면 합니다. 꼭 아름답고 좋은 말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상처가 되는 말이야말로 어떻게 해도 잊을 수 없는 말이기도 할테니까요. 이 주제가 너무 어렵다면 요즘에 자주 쓰는 말이나 한 때 자주 썼던 말을 공유해주셔도 좋습니다. 곧 뵙겠습니다.

 

 

_2020년 6월 27일 <문학의 곳간>(66회) 사귐 시간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