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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조건 : 공명(共鳴)―공동(共同)―공생(共生)

by 종업원 2011. 11. 16.


1. 구덩이에 빠지다


 산다는 것은 구덩이에 빠지는 일과 같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진창을 구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은 개인의 실착이나 체제의 함정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삶의 자리 혹은 삶의 영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예측할 수 없음’을 조건으로 할 때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의 형식과 닮아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들은 무언가를 쫓고, 쟁취하고, 추구하는 데서 삶의 동력을 찾곤 하지만 실은 무언가에 사로잡힐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은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바로 그것이 삶의 패턴을 설명하는 데 활용되곤 하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시쳇말의 본뜻일 게다.


 예측할 수 없고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의 형식이 ‘만남’을, ‘관계’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 된다. 기꺼이 구덩이에 빠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대상과 만날 수 있다. 구덩이가 얼핏 한정된 삶의 영역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곳은 ‘자아’가 자신 밖으로 걸어나와 대상과 만날 수 있는 ‘관계’가 생성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구덩이’는 대상과 화해롭게 합일을 이루는 도원(桃源)이 아닌 소란스러운 ‘도가니’에 가깝다. 달리 말해 구덩이는 나와 대상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경계영역’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삶의 자리에 다름 아니다. 

 
이선형의 두 번째 시집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꺼내들었던 이 글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변주해보자. ‘쓴다는 것은 구덩이에 빠지는 것과 같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면 쓰지 못한다. 이는 쓰기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며 어딘가에 ‘빠져야’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무언가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글을 쓰지 못/않는다. 바꿔 말해 ‘만남’과 ‘관계’ 없이 쓴(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산다는 것과 쓴다는 것의 간극에 대해 늘 고민하고 그것이 주는 긴장을 통해 삶과 글을 끌고 나가는 시인의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이선형의 시 배면에 흐르고 있는 낭만적 정조는 삶의 자리가 아닌 ‘저기-너머’를 행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선형의 시를, 아울러 ‘서정’을 지나치게 단선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단견에 불과하다. 이선형의 시가 고요함의 정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 내부가 뜨겁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 뜨거움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이선형의 시 내부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선형 시 내부에 흐르는 뜨거움은 ‘서정’에 대해 손쉽게 오해하곤 하는, 자아와 대상 간의 합일이 주는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선형의 시적 발화의 조건이기도 한 ‘만남’이란 ‘나’라는 임계(臨界)를 넘어 밖으로 흘러넘치는 지점을 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정’은 자아의 도원으로 침잠하는 ‘합일’의 세계만을 지향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이끌리는 힘에 의해 작동하는 ‘서정’은 차라리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사로잡힘의 순간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체계와 닮아 있지만 구덩이 속에서 비로소 만나게 되는 ‘대상’은 나와 닮지 않은 것이다. 시인이 “산다는 건 호랑이 등을 탄 거야”(「무명암」)라고 한 것은 ‘한치 앞을 알 수 없기에’ 빠져버린 ‘구덩이’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 “생전 처음 와보는 길 없는 길”(「구뎅이」)에 발을 내딛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터이다. 이선형의 시적 발화는 만남과 관계의 지반 위에서 이루어진다. 예측할 수 없고 제어할 수 없는 삶이 더욱 뜨거운 숨을 내쉬는 것은, ‘구덩이’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 시인이 구덩이에 빠져 있다.

 

 


2. 발밑이 닮았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어 내내 뒷걸음질을 치다가 구덩이에 빠진 것들이 있다. 힘없고 약한 것들은 그렇게 ‘발아래’에서, ‘구덩이’에서 ‘만나’ ‘모여’ 산다. 누구나 ‘위’를 바라보며 삶을 꾸려가지만 정작 삶은 ‘아래’에서만 시작할 수 있고 ‘아래’에서 끝이 난다. 평등하고 수평적인 어울림이란 어쩌면 모든 이가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아래’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을 직조하는 이 어울림의 관계를 이선형은 ‘닮는 것’이라고 한다.

 

길은 왼종일 걷느라 먼 산을 닮고

부은 발목은 내려다보이는 바다를 닮고

찡그린 구멍 속으로 생쥐는

막 도착한 저녁무렵을 닮고

버스 속 기우뚱 매달려 서있는 남자는

머리를 찧으며 조는 여자를 닮고

산동네에 왕관을 씌우는 저녁해는

분식집 모퉁이 핀 여뀌꽃 무더기를 닮고

버스 기다리느라 낡은 밤색구두는

등에 닿는 온기로 사귄 은행나무 몸피를 닮고

흙 속에 박힌 돌멩이처럼

살아있기에 서로 닮고

 

바다는 벽돌을 촘촘히 실은 손수레를

맨드라미 씨는 그치지 않는 싸움을

그치지 않는 깊은 밤을 닮고

                                                    ―「나는 너를 닮고」 전문



 이선형이 말하는 ‘닮는다’는 것은 육친적인 친화감이나 대상에 대한 호의가 만드는 환상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와는 성격을 달리 한다. 이 ‘닮음’은 자아와 대상 간의 정서적인 합일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상들 사이의 별다른 연관성도 찾을 수 없고 대상에 대한 특별한 매력을 느끼는 것도 아닌데 시인은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것들이 서로 닮아 있다고 한다(길과 산, 발목과 바다, 생쥐와 저녁 무렵, 남자와 여자, 저녁해와 여귀꽃 무더기, 밤색구두와 은행나무, 바다와 손수레, 맨드라미 씨와 싸움). 공통분모가 없어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살아있기에 서로 닮고”라는 구절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만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닮음의 조건이 될 리 만무하다. 어떻게 (어울려) 살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선형의 시 속에 무심하고 사소하게 놓여 있는 “흙 속에 박힌 돌멩이”라는 표현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바로 그 구절 속에 이선형의 시적 공간을 직조하는 중요한 원리가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선형이 직조하는 시적 공간의 중요한 원리는 바로 존재와 존재의 ‘닮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닮음’을 서둘러 ‘동일성’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지는 말자. 왜냐하면 이선형에게 ‘닮는다’는 것은 ‘업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흙 속에 박힌 돌멩이”는 어떻게 시인의 시선에 포착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이선형이 세계와 대상을 관조적인 시선을 통해 ‘풍경’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심하고 덤덤해보이는 “흙 속에 박힌 돌멩이”라는 표현은 존재와 존재가 겹쳐 있는 장면이며 바로 그 겹침이야말로 각각의 존재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빛을 낼 수 있는 조건임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이선형에게 ‘닮았다는 것’은 별다른 연관성을 찾기 힘들지만 겹쳐 있는 것들의 어울림이 삶을 직조한다는 것, 삶이란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는 관계 양식을 통해서만 지탱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선형의 ‘닮음의 시학’은 ‘존재의 미학’과 이어져 있다. 동일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자아의 침잠으로는 존재의 미학에 가닿을 수 없다. 세계를 풍경화 하는 관조적인 시선은 밖에서 내게로 밀려드는 외부의 것을 한사코 막아내려는 자아의 자맥질이며 그것은 “허우적 거릴수록 더 깊이. 자신을 걸어 잠그고 나는 불쌍한 문지기”(「외경」)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로잡힌다는 것이란,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란, 닮았다는 것이란 바로 존재와 존재가 서로를 업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업고 있는 사람은 발아래의 존재들을 살피는 시선을 가져야만 하기에 업는다는 것은 기꺼이 자신의 ‘등’을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업는다는 것, 닮는다는 것의 불가피함. 존재의 미학은 바로 이 관계의 불가피함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기꺼이 업을 수 있을 때, 그렇게 닮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발할 수 있는 것.

 

 


3. 업둥이를 업다


 삶은 구덩이에 빠질 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구덩이 속에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것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다는 것이 닮음의 조건이 된다. 닮았다는 것은 무언가에 기꺼이 자신의 ‘등’을 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내 몸에 타인의 흔적이 남는다. 지울 수 없는 그 흔적이 삶의 조건이자 동력인 것이다. 시인이 “얼룩이지고 때가 묻어가는 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존재가 되는 것”(「설탕 한 봉지」)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얼핏 비슷해보이는 “불쌍한 문지기”와 “오직 하나의 존재” 사이의 거리는 삶에 새겨져 있는 타인의 흔적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등을 얼마나 허락할 수 있는가를 통해서만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몸에 겨운 모래 짐을 포개 싣고

 

장미넝쿨 담 아래 타박타박 지나는

 

등이 젖은 당나귀야

 

편안하지 못한 것은

 

설움이 아닐 게야

 

너는 모래를 편안히 해주고 있는 게야

 

납작하게 눌려진 네 등은

 

젖은 모래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는

 

한참 밤인 게야

                                                          ―「당나귀 울음」 전문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콘베어벨트 위로 쓰레기 자루 고봉으로 쌓은 손수레 한 사내가

 

끌고 간다 짐에 눌려진 등이 초승달 눈을 뜨고 한밤중을 한낮으로 걸어간다

                                                                    ―「등」 부분


 


 납작하게 눌려진 등을 가진 존재들의 삶이 서럽지 않은 것은 그들을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철지붕 아래 납작한 사람들”(「납작한 집」)이 “제 몸 앞으로 뒤로 석류 줄기 구부러진 길을 내”는 것처럼 이 세상이 “등이 젖은 당나귀”의 “납작하게 눌려진”(「당나귀 울음」) 등에 업혀 비로소 (숨)쉴 수 있다. 우리들의 밤이 안락한 것은 “한밤중을 한낮으로 걸어”(「등」)가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곳은 누구가의 ‘등’이다. 누군가에 업혀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을 때 또 다른 누군가를 업을 수 있다. 아! 우리들은 서로에게 ‘업둥이’인 것이다. 발밑의 존재들을 기꺼이 업고, 그렇게 타인의 흔적을 더해가며 삶을 직조하는 것이다. 이선형의 ‘닮음의 시학’이 ‘존재의 미학’과 잇닿아 있다는 것은 여기서 다시 확인된다.

 

한 올 바람이 지난다 아이를 등에 업고 염천 복날 지난다

 

그늘 내린 다리 밑에 사람들 모여 앉고

미루나무 잎그늘마다 매미 포개 붙어

더운 화음 귀 따가운 한낮

아이 체온은 그대로 보태지는 게 아니었다

내게 기댄 말캉말캉한 숨을 업고 땀 토하면

살갗 비집고 여러 체온 업고 온 바람이

두 몸을 지난다

 

팥죽땀 손등으로 훔치며 어디선가

지줏대 타고 넌출이 붉게 오르고

 

매미를 업고 미루나무를 업고 사람들을 업고

삼복염천에 살껍질 벗겨지는 제 몫의 자리를 업고

포개진 몸들 목이 쉬는 화음

 

더운 몸에 더운 몸이 그늘길을 내어

지렁이는 해를 업고 저녁별 내리도록 기어간다

                                                       
                                                         ―「그늘길 내다」 전문


 


 그늘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아니 “더운 몸에 더운 몸이 그늘길”을 낸다고 했으니 사람들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해야겠다. 그것은 곧 존재가 존재의 그늘이 되고, 그 어울림으로 만들어진 그늘이 살아감(생명)의 길을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더운 화음”을 듣는다. 사람들의 어울림이 만드는 화음이란 특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내쉬는 숨을 가리키는 것일 터이니 말이다. 그러니 “더운 화음”은 듣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호흡하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서로를 업고 있는 탓에 “포개진 몸들”이 내는 숨은 거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목이 쉬는 화음”이 내는 길은 나무를 살게 하는 물관과 다르지 않다. 존재들의 어울림이 만든 ‘숲’ 아래에서 우리가 숨쉰다. 아니, 꽃핀다(“아이 업은 볼품없는 몸이 굵은 빗발로 지나간다 분홍 아이 옷에서 번지는 살비린내, 어미 등을 놓칠까 꽉 잡고 분홍색 등이 불룩 꽃 핀다”, 「선인장 계단」) 업둥이를 등에 업은 이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지겠지만 “여러 체온 업고 온 바람이” 몸과 몸 사이의 공간을 관통할 때,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몸과 몸이 만나는 공간이 공명통으로 열리며 화음으로 울린다. 이선형은 그것을 공명(共鳴)이라고 부른다.

 

 

4. 공명(共鳴)―공동(共同)―공생(共生)

 

한 자리에 서서 몸이 그저 눈인 줄 알았던 나무도

지나는 이의 소매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때 있다.

이내 놓치고 말지만

 

고집부리는 마음이 소매를 당기고 있다.

어둑한 저녁이 걸어 나갈 길 뻔한데도,

 

나무야, 우리는 잠깐 손가락을 꺼냈다가 넣는구나.

햇빛이 우리 몸에서 그림자를 끄집어내어 바닥에 삐죽 그려놓았다가

이윽고 거두어 넣는 저녁

 

하지만 몸 안에는 공명의 그림자 늘 있어,

 

신발 뒷축은 비스듬히 낡아가고

나무창틀은 기우는 볕으로 등이 마른다.

저도 모르게 짓는 사소한 표정이 보고 있는

사물 저 너머.


                                                               ―「공명共鳴」 전문


 


 이미 첫 번째 시집에서부터 시인은 “내 속에서 길을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 소리는 “고양이와 물오리와 소의 검정 울음소리”였고 “아무도 모르게 저 혼자 떨어지는 잎의 소리”(「봄밤의 기척」, <<밤과 고양이와 벚나무>>, 시와사상, 2000)이기도 했다.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직감했을 것이다. ‘소리’란 ‘홀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예감 했을 것이다. ‘소리’란 만남이며, 부딪힘이며, 좌절이며, 고통의 흔적들로 직조되는 것임을. ‘소리’란 너와 나의 하나 됨이 아니라 외려 너와 나 사이의 간극에서, 어긋남에 의해 만들어진다. ‘소리’의 발원지는 바로 너와 나 사이, 차라리 텅 비어 있기에 밝게 빛나는(空明) 관계라는 ‘사이-공간’이지 않을까. 몸 안에 있는 “공명의 그림자”란 바로 이미 나와 연루되어 있는 ‘관계’의 흔적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공명」은 이선형이 직조하는 시적 공간의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선 ‘공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보자. 그것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감응(affect)과 비슷해보지만 그렇다고 이선형이 노래하고 있는 공명의 조건이란 ‘나와 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명’이란 차라리 “사물 저 너머”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짓는 사소한 표정”이 보고 있는 “사물 저 너머”란 무엇이며 그곳은 어디인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선형 시인에게 ‘닮음’이 동일성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사물 저 너머” 또한 현실을 초탈한 낭만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물 저 너머”란 블랑쇼가 언급한 ‘대상 속으로 사라진 것을 나타나게 하는’(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곳과 다르지 않은 것일 터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에게 업혀 있고, 그렇게 서로를 업을 수 있을 때 존립할 수 있다는 ‘존재의 조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공명(共鳴)은 우리 모두의 조건(共同)이며 그것은 곧 공생(共生)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일상의 고즈넉함 속에 숨겨져 있는 존재들의 어울림을 섬세한 언어로 길어올리는 이선형의 시 전면에 비애의 감정이 흐르고 있는 듯 하지만 그 아래에 모든 존재들의 삶을 긍정하는 따뜻한 시선이 감싸고 있다. 콩을 파는 아주머니가 비둘기를 쫒기 위해 든 매는 비둘기를 내려치지 않고, 겨우 콩 하나만을 삼킬 수 있는 비둘기 또한 졸다 깬 아주머니 옆에서 주억거린다(「짐짓」). 혹은 가난한 산동네의 “발꿈치 창문”(「안창마을」)에는 하루 양식만큼의 빛이 들어와 살림살이를 데우고 그렇게 “기우뚱거리며 미흡한 하루는” 우리를 “생생히 살아있게 한다”(「조응照應」) 그럴 때 공터에 넉넉하게 넘치는 햇볕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분주한 두레상 같다. 연약해서 함께 살아야만 하는 세상의 ‘업둥이’를 시인의 섬세한 언어가 기꺼이 업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세상 여윈 것들 살 오르는 소리”를, “비우면서 채워지는 소리”(「풀냄새 젖냄새」)를 듣게 되는 것이다.

 

산꼭대기까지 집들이

빽빽하게 밀고 올라간 비탈

관절이 맥없이 꺾이는

슬레이트 지붕들 속에 난데없이

아직도 살아있는 잔디 무덤

두둑을 올려주던 사람 있어

길 어두워도 또박또박 돌아오라고

아랫목 묻어둔 밥그릇 봉분

밭두둑에서 뽑히면 고랑에서 살고

고랑에서 던져지면 바위틈

살아있던 날이 떠밀려 올라간 곳

밟힌 개비름나물은 내쫓긴 줄기에서 뿌리를 낸다

파릇파릇 집 앞에 내놓은 화분 같은 무덤이

파릇파릇 마중 나온 살아있는 사람이

삶에도 죽음에도

골골샅샅이 공평하게 들어오는

햇볕이 닿자 윙크를 한다


                                                     ―「산복도로 무덤」 전문


 


 산꼭대기에 집들이 빼곡한 것은 한 가수의 노랫말을 빌리자면, 연약해서 자꾸만 밖으로 밀려나가는 존재들이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루시드 폴, 「평범한 사람」, <<레 미제라블>>, 엠넷미디어, 2009)기 때문이다. 헐벗은 집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모습은 ‘무덤’처럼 보이지만 아픈 것들에 자꾸 몸이 기우는 시인의 시선에 의해 그곳은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화분’으로 변주된다. “살아있던 날이 떠밀려 올라간 곳”은 더욱 살기 힘든 곳이겠지만 “관절이 맥없이 꺾이는” 헐벗은 집들이, 자신보다 더 약하고 헐벗은 집을 ‘업고’ 있다. 산복도로는 약한 것들이 어울려 낸 희미한 길이다. 가진 것이 없기에 도시 밖으로 떠밀려 나간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어울려야 했던 삶의 궤적이 길을 만든다. 버려진 공터에 ‘개비름’이 “내쫒긴 줄기에서 뿌리를” 내는 것처럼 이름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좁은 골목에서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산다. 집이 집을 업을 때 ‘길’이 나고 사람이 사람이 업을 때 ‘더운 숨’이 난다. 사람들의 어울림이 숲을 만드니 그 사이에서 “파릇파릇”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마중을 나온다. 그 존재의 그늘 아래에 우리는 서로에 기대고 어울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선형, <<공명의 그늘>>, 푸른사상, 2011(미출간) 해설




1. 나는 소설 평론으로 등단을 했고 제도적인 전공도 '소설'이지만 늘 '시'에 매혹되었다. 실은 이런 구분 자체가 참으로 '한국적인 것'인데, 등단 직후 한 매체에 시 계간평을 쓰는 것을 계기로(유명한 필자가 펑크를 냈기에 그 기회가 내게 주어지게 되었다) 시를 즐겨 읽기만 하던 것을 멈추고 좋아하는 것에 관해 쓸 수 있게 되었다. 비평은 좋아하는 것을 누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게 시 비평을 하면서부터 나는 시를 '덜' 좋아하게 되었다. 그것이 글 쓰는 이의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내 비평은 삶의 바닥에까지 내려오지는 못했지만 대상에 대한 좋아하는 마음정도는 내려 놓고 글을 쓸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믿고 싶다. 그 작품에 '응답'을 하기 위해서는 조금 차가워져야 한다. 내 비평이 또 다른 매개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이가 오해 없이 그 작품과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덜 좋아해야 한다. 좋아하는 것보다 덜 좋아하는 게 더 힘들 때가 있다. 더러 읽어내기 힘들만큼 곤혹스러운 작품에 대해 글을 써야할 때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다루었던 시들은 대개가 배울 점이 있었다. 몸을 기울여 열심히 들으면 그의 어법을 배울 수 있었다. 마치 내 어머니의 어법 속에서 무한한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그 어휘들과 뉘앙스들에 몸을 기울여 찬찬히 듣노라면 그 존재들이 비로소 내게로 와 점점이 박힐 때가 있었다.


2. 덜 차가워지면서, 시에 대한 상찬만 늘어놓을 수 있는 글을, 마음껏 좋아해도 되는 글을 1-2년정도 써서 그것을 책으로 묶어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다. 냉철한 이성의 언어보다 뜨거운 감정의 언어에 더 큰 매혹을 느끼고 있지만 '지역'에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혹여나 감지될 수도 있는 '낭만적인 어조'에 대한 검열이 심한 편이다. 촌스러워보일까봐, 냉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까봐, 향토애처럼 보일까봐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책 뒤에 붙은 이상한 것'이라고 해도 늘 '해설'이 쓰고 싶었다. 마음껏 좋아하고 그것을 글로 써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글은 내가 쓴 첫번째 해설이다. 마감을 몇번이나 어기며 4-5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4번째 읽었을 때, 시가 내게로 왔다. 이렇게 좋은 시가 묵히고 있다는 것이, 쓸쓸하게 제 자리 하나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 언어로 이 시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외려 글 쓰는 것을 방해했다. 나는 냉철해지지도 못했고, 내 안의 오래된 검열 체계에 무기력하게 가로막혀 마음껏 뜨거워지지도 못했다. 그게 못내 아쉽다. 내게 시집 해설을 부탁한 시인에게 미안했다. 이 메모는 미처 쓰지 못한 해설의 찌끼이겠지만 시를 읽으며 휩싸였던 감정의 덩어리이자 '언어화'되지 못한 뜨거움의 감정으로 읽혀지기를 바란다.


3. '시'에 매혹되는 것은 '듣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매번 내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열심히 들을 수 있는 이에게만 도착하는 메시지가 있다.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이 시인의 시를 반복해서 읽으며 '듣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게 자신의 소리를 기꺼이 들려준 시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중앙동 골목 어귀에서, 소박한 문학 모임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시인을 몇 차례 본적 있다. 시선을 늘 20도가량 아래로 하고 있기에 그만큼의 그림자가 얼굴을 감싸고 있던 낮게 하강하던 그 음영을 기억한다. 엷고 조용했기에 하던 일을 멈추어야 들을 수 있던 그 음성을 기억한다. 조금의 욕심도 부리지 않는 그녀의 시를 읽으며 그 음영과 음성을 다시금 떠올렸다. 원고는 한없이 더디게만 진행되었고 내게 독촉을 하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에 마음이 쓰여 나 스스로를 더 매몰차게 내몰았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지만 끈질기게 기다려준 시인 덕분에 '글 한편'을 탈고할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구덩이에 빠지는 일과 같다."는 첫 문장을 떠올렸지만 다음 문장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지만 그 문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인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끝까지 버텼다. 그 버팀이 그리 검질기지 못해 문장은 성길기만 했다. 그게 못내 아쉽다. 


4. 늘 공격 당하고 오해 받는 '서정시'를 돌보고 싶었다. 다른 문맥으로 '서정시'를 읽어낼 수 있는 경로를 만들고 싶었다. '서정시' 이외에는 다른 시를 쓸 수 없는 그런 이들의 목소리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싶었다. '서정시'라는 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보고 싶었다.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는 동안, 나는 그리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겨우 글 한편을 썼을 뿐이다. 그 글을 여기에 올려놓는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오늘도 다짐한다. 덜 좋아하기로. 그렇게 더 많이 쓰기로. 더 열심히 쓰기로. 내 마음과 바꾼 글에 더 많은 것을 걸어보기로. 오랫동안 쓰고 싶다는 바람 하나를 그 다짐에 어슷하게 덧대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