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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달리기 살림⏤코로만 숨 쉬기(4)

by 종업원 2023. 11. 17.

2023. 11. 16
 

작업실이 춥고 몸도 좋지 않아 일찍 퇴근하는 길에 ‘카파드래곤’에 들러 원두를 샀다. 집에서 작업을 할 수도 있기에, 혹여라도 커피가 없어 작업이 중단될까 오늘도 괜한 염려를 하며. 지난번에 구매했던 원두 두 종류에 대한 후기를 전하며 신맛이 나는 원두를 내릴 때 부딪친 문제에 대해 짧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사장님 또한 퇴근을 준비하는 듯했지만 이내 신맛 나는 원두를 갈아서 커피 한잔을 내려주신다. 커피 한 잔을 내리는 동안 그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이야기를 건넨다. 자신은 20g이 한잔 양인데 이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고, 원두가 부풀어오르는 이유와 어떤 방식으로 내리는 게 좋은지, 신맛이 나는 원두와 강하게 볶은 원두를 내릴 때 물온도는 어느정도가 적당한지, 정해놓은 원칙을 따르기보다 내리면서 원두 상태를 계속 살피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그렇게 원두를 살피며 자기에게 맞는 커피 맛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며 이야기를 건네듯 편하게 말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간 알고 있던 커피에 대한 정보와 지식보다 더 많은 걸 배운 듯 하다. 원두와 함께 드립 커피 값도 드릴려고 하니 이건 한산할 때 한 잔 내려드리는 거라고 가볍게 거절하신다. 단물이 조금 남아 있을 때 껌을 뱉는 게 좋은 것처럼 커피를 내릴 때도 마찬가지라며, 원두 산지와 지명을 ‘나주배’처럼 익산이든, 울산이든 조금씩 다를 순 있지만 기본적으로 배는 맛있는 과일인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데, 힘주지 않은 비유에 커피를 대하는 태도가 배어 있는 듯했다. 힘들이지 않고 ‘뚝딱’ 내어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한 잔을 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커피를 내려왔을까. 젠체하거나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심드렁한 척하지도 않았던 것에서 이 사람이 커피를 어떻게 대해왔는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려주신 커피를 마시며 퇴근하는 동안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비싼척을 하기 위해 애쓰는 세상에 나 또한 휩쓸려 있었구나 싶다. 아껴두었다가 ‘짠’하고 보여줄 것이 아니라 오늘도 어제 그랬던 것처럼 보자기를 펼치듯 내어줄 수 있는 것을 즐겁게 건네야겠구나 마음 먹었다. 


늦은 밤, 세미나를 마치고 잠시만 누워서 쉰다는 게 깜빡 선잠이 들었다. 날이 차고 몸도 조금 무거웠지만 오늘이 아니면 또 다음 주까지 미뤄질 거 같아서 벌떡 일어나 달릴 채비를 갖추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음식물쓰레기 카드가 달릴 때 입는 반바지에 있어 속으로 환호성을 지른 뒤 한쪽에 쟁여두었던 음식물쓰레기를 챙겨서 나섰다. 가끔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해온 덕인지 몸통 흔들림이 적어 늘 약간 긴장하는 1km 구간에서도 단단한 안정감을 느낀다. 오늘도 코로만 숨 쉬며 달린다. 기온이 7도로 나와서 올해 마지막 반바지가 아닐까 싶었는데, 달려보니 한두 번 더 반바지만 입고도 달릴 수 있겠다 싶다. 요 며칠 잠이 부족해서 몸이 무거웠는데 서서히 몸이 풀린다. 살살 두드리며 몸을 깨우기 때문이다. 장림에서 다대포로 달리며 찬찬히 몸을 들여다보며 펼쳐본다. 접어두었던 몸과 주름진 마음을 가을밤 공기에 넓게 펼친다. 달릴 때라면 접어둔 만큼, 주름진 만큼 더 길게, 그래서 더 넓게 펼칠 수 있다. 달리는 게 몸을 펼쳐보는 몸짓이라는 걸 알게 된 것만큼이나 코로만 숨 쉬며 달려야겠다는 작은 원칙을 품으면서 달린다는 게 몸과 땅과 공기와 풍경을 즐겁게 누리는 시간이 되었다. 특히 살림을 일구는 작은 태도였던 ‘코로만 숨 쉬기’를 달리기와 이으면서 달리는 동안 피로가 쌓여 몸이 무거워지는 길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에 달릴수록 가벼워지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번에도 달리는 동안 하루가 바뀌었다. 9시쯤에 나서야 달린 후에 곧장 살림글도 쓸 수 있겠구나 싶다. 오늘은 다대포에서 다시 장림 쪽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처 장림포구까지 달려본다. 그리고 장림시장을 거쳐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돌았다. 헤아려보니 3년 6개월만에 10km를 달렸구나 싶다. 약간 피로감을 느꼈지만 코로만 숨 쉬었기에 괜찮을 거라 여긴다. 달리면서 ‘카파드래곤’ 사장님을 생각했다. 커피를 내리며 이야기를 건네주었던 것처럼 보자기를 풀어서 살림을 하며 쟁여두었던 것을 건네는 몸짓을 떠올렸다. 달리기에 이끌렸고 여전히 이끌리는 이유는 이 또한 살림을 펼치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을 잘 살펴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지치지 않고, 지루해하지도 않은 채 즐겁게 펼쳐내며 누리는 일. 매번 다르게 몸과 마음을 펼치기에 새롭게 쌓이는 살림이 있다 여긴다. 그 살림이 어떤 건지, 무슨 쓸모가 있는지, 누구에게 건넬 수 있는 건지 아직 모를지라도. 이따금씩, 코로만 숨 쉬며 달리는 동안 몸 안팎을 들고나며 새롭게 쌓이는 것이 무엇일지, 마음껏 몸과 마음을 펼치는 몸짓으로 익히는 게 어떤 건지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다. 언젠가 오랜 친구가 집에 방문했을 때, 잠들 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어놓았던 것처럼, 그 덕에 잠들 때까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처럼 살림을 꾸려간다면 커피 한잔을 내리는 것처럼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무언가를 건네며 나 또한 잠시 어딘가로 건너갈 수 있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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