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적인 것'이라는 '포르노그라피'
우연한 계기로 몇몇의 사람들과 한 권을 책을 같이 읽게 되었습니다. 특출나지는 않지만 이야기할 거리가 풍부한 책을 선정해야했기에 선택한 것이 제프리 골드파브의 <<작은 것들의 정치>>(이충훈 옮김, 후마니타스, 2011)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파생된 단상들을 거칠게 기록해보았습니다. 서둘러 말한다면 <<작은 것들의 정치>>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만, 외려 감흥을 느낄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슬며시 보여주는 대목들에 집중해보고 싶었습니다. 말 그대로 '단상'들에 불과하지만 천천히 그 단상들에 논리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과 심플한 디자인이 주는 기대와는 다소 다른 전형적인(?) 사회과학 서적이었던 탓에 생각만큼 활발한 논의를 교환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우리들의 읽기와 쓰기의 습관을 확인하게 하고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함께 읽었던 구성원들이 느꼈던 '지루함'의 출처는 저 책에 있었다기보다 자극적인 내용이 없으면 '독서'를 지속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습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작은 것들의 정치>> 속에는 <간단한 관점의 변화만으로도 획득되는 급진적 혁명의 에너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2011년의 유행어라고할 수 있는 '정치'의 범람입니다만, 또 혹자는 '닥치고, 정치!'라는 강령까지 부르짖습니다만 정작 현실 속에서는 '정치의 몰락'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정치'야말로 2011년 가장 핫(hot)한 '상품'이라 하겠습니다. '닥치고, 정치!'라는 주문 하나면 모든 것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이 충독되는 듯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정치철학 이론의 홍수라고 할만큼 '정치적인 것'이 빠진 인문학 관련 서적을 찾기 힘든 지경입니다. '정치적인 것' 또한 출판 시장의 가장 '핫'한 상품이 된지 오래입니다. 몰래카메라의 형식이 아니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수 없는 것처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가 아니면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방송계처럼 이제 '정치'가 아니면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문학도, 혹은 '인문오타쿠'들이 급진적 혁명에의 열망을 내장하고 있는 '이론'에 몰입하고 있는 현상 속에서 얼핏 '정치'를 '포르노그라피'화 해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까지 가지게 합니다. 어떤 면에서 <닥치고, 정치>는 축자적인 의미에서 함의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꼼수'류의 '풍자'가 곧장 '소비'와 연결되고 있는 것과 맥을 함께 합니다.
아마도 이해관계가 다른, 그러나 대학원이라는 조직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구성원들이 함께 모인 첫 자리에서 <<작은 것들의 정치>>를 선정한 것 또한 이런 시류에 편승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 읽기가 시들시들 했던 것은 이 책이 '19금'이 아닌 '전체관람가'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경험해서 아시겠지만 '19금'은 자극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skip'을 하게 되고(정확하게 읽는[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지요) '전체관람가'는 보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이 책을 읽으며 그간 별다른 고민을 해보지 않았던 일상 속의'19금 구조'가 독서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인지'가 곧장 '변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자가진단이 변화의 첫단계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볼 따름입니다. 이후에 좀 더 고민해보고 싶은 것입니다만, 이른바 '서평'이라는 글쓰기와 그것을 통해 유통되는 지식(이론)이 가리키는 지점이 적지 않은 듯합니다. 논의의 하이라이트 부분만을 부각시키고 있는 '서평'식 글쓰기의 범람과 그 파급력의 상승은 담론장의 '읽기'와 '쓰기'가 변화하고 있는 중요한 지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하면 '하이라이트'가 아니면 '읽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쓰기'의 사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2. 미국식 '강남좌파'가 제시하는 '제 3의 길'
이 책은 ‘작은 것들의 정치’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대한 주장을 몇몇 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분석·주장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들의 정치'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는 “상황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로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이러한 투쟁은 국가와 초국적 기업의 힘을 통제하고 개인의 신념이 갖는 힘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상황적 현실이라는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힘을 초래한다. 그런 상황을 정의하는 힘이 작은 것들의 정치의 원동력이다. -23쪽 그렇다면 필자가 마치 요술램프를 문지르듯이 빈번하게 활용하고 있는 고프먼의 '상황적 현실'이란 무엇일까요?(정확하게 말하면 '고프먼'의 "상황적 현실"이 아닌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흡사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자주 불러내는]고프먼의 '상황적 현실'입니다) 필자에 따르면 그것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용어로 어떤 상황을 정의하고, 공동으로 행위할 능력을 발전시키며, 테러와 헤게모니적 권력에 대한 민주적 대안을 구성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우선 이데올로기의 밖에서 논의를 진행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논의는 거시적인 공간이 아닌 미시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아파트, 식탁, 극장, 살롱, 인터넷 등. 헌데 왜 '침실'은 없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가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는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이 하버마스가 말한 “모든 시민들이 공동의 행위 과정을 찾으면서 당대의 문제를 논의하고 상호간에 이해에 도달하는 그런 공공영역”(151쪽)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적인 공공영역이 아닌 이념이 붕괴된 시대,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는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구성되는 사적인 영역에서 구성되는 공적 담론의 힘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골드파브는 그것을 '사적 영역 내에서의 공적 역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독립적인 상호작용, 비이데올로기적인 자아 표현”(66쪽)이 바로 ‘일상’에서 가능하다는 것인데 일상적인 실천에 기반을 둔 행위, 바로 이러한 일상의 실천에 “프레이밍의 정치와 상황에 대한 정의가 관련되어 있었고, 그런 상황 정의는 아렌트가 ‘혁명의 잃어버린 보물’이라고 불렀던 것”(68쪽)입니다. 골드파브의 주장은 역사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사건들에 '혁명적인 힘의 잠재'라는 문맥으로 변주시키는 것은 그가 참조하고 있는 이론가들의 이론에 의해서입니다. 가장 빈번하게 거론하고 있는 아렌트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아렌트를 정치를 철학으로 대체한 전체주의에 대안을 제시했다고 평가하고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 역량, 즉 자유의 원리에 근거해 타자와의 현존 속에서 하나의 평등한 존재로 출현하고 말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협력하는 행위 능력을 ‘정치권력’이라고 하며 이를 ‘강권’과 구분 짓고 있습니다. 아렌트에게 있어 ‘상호작용’이란 “(정치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의미하고 ‘사실적인 진리’가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 이때 아렌트의'사실적 진리'와 '철학적 진리'의 구분이 중요해집니다. 사실적 진리란 “자유로운 공중들 사이에서, 그리고 이들을 통해 구성”되는 진리를 의미합니다(이것이 전체주의와 자유주의를 구분할 수없었던 푸코의 논의와 갈라지는 지점이라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근대정치는 일종의 철학적 진리, 이데올로기, 사실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 사실적 진리는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진리를 뜻한다는 것이지요(“사실적인 것이 때때로 해석적인 것으로 변한다고 해도 해석적인 것이나 독트린이 정치를 대체할 수는 없다”, 41쪽). 그러나 필자의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미심쩍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특히 그가 원용하고 있는 '이론의 활용' 앞에서 자꾸 멈춰서게 됩니다. 먼저 ‘사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바로 필자가 '사실'이라는 용어를 활용하는 방식 속에 어떤 ‘믿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리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사실'을 은폐하고 호도하려고 해도 '사실(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식의 '믿음'말입니다. 골드파브가 그리고 있는 '제 3의 길'은 이데올로기만 걷어내면 조우할 수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길처럼 보입니다. 서둘러 말해 필자가 지향하고 있는 '길'은 자본주의의 '외부성'과는 무관합니다(그것은 작은 것들의 정치가 현실 정치장에서 발현된 사례로 미국 민주당 경선으로 출마했던 '하워드 딘'을 들고 있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박원순이라는 쾌거가 가지는 한계와 연관해서 뒤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예” 혹은 “아니오”라는 이분법적 논의의 바깥의 가능성을 탐문하는 것이라 바꿔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사회주의 vs 자본주의>(두 개의 경쟁적 프레임)라는 냉전체제, 혹은 근대적인 담론 체계에 잠식되어 있는 혁명(대안)이 사라진 시대에 ‘제 3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된 것일 겝니다. 이를 “진리를 특정 진리 레짐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34쪽)으로, “정당 이데올로기의 틀 밖에서 정의되는 공간, 즉 대항적인 틀”(36쪽)의 발견, 혹은 발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골드파브의 편의적이고 안이한 이론 활용은 미국에서 프랑스 이론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 삼을 수도 있겠습니다(미국을 한국이라 바꿔도 그 뜻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마침 도서출판 난장에서 프랑수아 퀴세가 쓴 <<루이비통이 된 푸코>>라는 책을 출간 준비 중이라고 하네요. '위기의 미국 대학, 프랑스 이론을 발명하다'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등 저마다 독특성을 자랑하는 현대 프랑스 사상가들의 사유가 미국에서 어떤 연유로 '프랑스 이론'이라는 명칭으로 통칭되는지, 그리하여 마치 명품처럼 브랜드화되어갔고, 그 귀결이 미국 한계를 어떻게 뒤바꿔놓았는지 추적하는 흥미진진한 프랑스 사상 수용사이자 지성사라고 하네요. 11월 중에 출간 된다고 하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이러한 논의에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덧붙이게 됩니다. '이데올로기 밖에서의 대안이 자유로운 구성원들의 상호작용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복잡한 현실적 문맥을 단순화해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필자가 푸코의 이론을 진리와 권력의 관계 및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통치 체계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훈육'의 문맥만이 아닌, '인간이라는 종'을 관리 및 통제하는 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생명권력’의 문맥말이지요. 아렌트가 말하는 공적 영역 및 자유로운 상호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정치적인 것 또한 폴리스에 거주하는 아테네인들에 한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폴리스 안에 있으면서 내부 구성원이 될 수 없고 폴리스 밖으로도 나갈 수 없는 ‘벌거벗은 생명’(호모 사케르)이야말로 ‘생명권력’이라는 새로운 통치성에 의해 관리되는 오늘날의 정치적 환경을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논하고 있는 '사회'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단순하고 편하게 보는 치들을 경멸하는 타입입니다. 세계를 단순하게 규정하고 멋진 슬로건만을 쫑알거리며 혁명과 급진성을 주억거리는 치들에 대한 경멸은 자기비판을 포함하는 것일 수밖에 없겠지요. 한국의 대학원이라는 아카데미에서['만'] 이루어지는 논의에 대한 의심, 그들을 싸잡아서 비판해도 안 될 것이지만 무엇보다 '많이 벌어서 많이 쓰는 것이 미덕'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돈 안 되는' 책들을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돈 안 되는' 책들에 열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곧장 '멋진 취미'로 포장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일 겝니다. 동의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거나 물음을 던지면 대개는 '침묵'으로 자신의 입장을 서둘러 감추고 이것저것 주워삼킨 이론들을 두루뭉술하게 늘어놓곤 하는데, 그것을 안타까워해야할지 경멸해야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이들이 맺는 '관계'가 상품을 구매하고 구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소비'의 일환처럼 느껴질 때도 적지 않은 일이구요.
논의가 조금 뜨는 감이 있지만 여기서 강준만의 <<강남좌파>>(인물과 사상사, 2011)라는 책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습니다.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노무현 정권 시절 제기되었던 '정치적, 이념적으로는 좌파이지만 생활양식은 강남스러운'이들에 대한 분석과 함께 정치인들에 관한 논평을 하고 있는 도발적인 저작이지요. 이 강남좌파적 구조는 국회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담론장에, 대학원 속에, 인문학 대중 강좌 곳곳에 '강남좌파적 구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골드파브의 단순하기에 명쾌한, 희망적이기 그지 없는 논의 속에서 한국의 '강남좌파적 구조'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니 골드파브가 말하고 있는 '작은 것들의 정치'란 바로 이 '강남좌파적 구조의 미국식 버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필자가 말하는 자유로운 상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새로운 공적 영역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3. 오늘, '급진적 야동'을 끊을 수 있는가?
골드파브는 친절하게도 한국어판 후기에서 '촛불 시위'를 '작은 것들의 정치'를 실현하는 중요한 사례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촛불 시위'가 중요한 논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골드파브식의 대책없는 상찬은 동의하기 힘듭니다. 시종일관 노골적인 비판만을 가하고 있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정치'에 대한 열광이 함의(은폐)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성해볼 수 있었습니다. 저의 정치적 감각과 인문학적 관심의 대상 또한 그 반성의 대상에 포함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좀 지나버렸지만 이 책을 독해할 즈음 박원순이 새로운 서울 시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안철수 열풍과 함께 시민사회의 승리로 모두가 흥분해 있었지요. 인터넷으로 생중계된 서울 시장 취임식은(그리고 여러 차례 강조했던 '복지'에 대한 언급) 분명 기념비적인 것이었습니다(sbs의 한 앵커는 그것이 화려한 취임식을 기대한 서울시민들의 권리를 뺏은 처사였다는 개드립-클로징 멘트를 했지만요). 그러나 저는 그 열광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불편함의 실체를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2011년 한국 진보 정치의 성과에 '박원순' 서울 시장이 서 있다는 것. 그것은 한국에 아직 '진보' 세력이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명박을 욕하면 '좌파'가 되고 '야권단일 후보'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슬로건인 사회의 '진보'란 무엇일까요? 이명박을 욕하는 것이 '좌파'가 되는 것이야말로 '이명박적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그리고 한나라당이 적대적으로 공존하며 유권자들을 유린하는 정치적 술수와 겹쳐 있습니다(이들이 경합하는 선거란 '카드 돌려막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선거를 치르면 치를수록 유권자들은 더 심각한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이지요). 한미 FTA를 체결한 정당과 정권은 한나라당이 아닌 이합집산으로 모여 있는 민주당과 노무현 정권 아니었던가요? 노무현과 박원순이 '좌파'가 되는 국가에 우리가 있습니다. 급진적 혁명 에너지를 '19금'으로 소비하고 있는 인문학 담론장에 우리가 있습니다. 기업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에 대한 반성이 그를 욕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열광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이명박적 프레임 속에 노무현과 박원순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좌파 이론'을 '패션'으로, '포르노그라피'로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외려 지금과는 '다른 힘'이 출현하는 것을 막고 있을 뿐입니다. 박원순에게 (건강한) 우파라는 포지션을 이 사회가 부여할 수 있을 때, 관람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자신이 읽고 있는 고급 이론의 괴리를 성찰할 수 있을 때, '일상 속의 혁명'의 단초가 가까스로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요? 돌연한 마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급진적이고자 한다면 더 열심히 읽고 써야 합니다. 섬세하고 정교한 이론을 '19금' 영상을 보던 습관으로 skip 해가며 재빨리 하이라이트 부분만 절취해서 소비하는 것. 그렇게 재빨리 획득한 정보로 개구리 새끼마냥 웹페이지를 두서없이 뛰어다니며 잘난 척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론 꾸준히 읽고 쓰는 이의 발밑조차 따라갈 수 없습니다. 어쩌면 '작은 것들의 정치'는 이미 생활이 되어버린 급진적 이론이라는 '야동'을 오늘 당장 끊을 수 있느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 책을 읽고 난 후 Goldfarb라는 저자의 이름이 괜히 거슬렸습니다.
** ‘디시인사이드’가 점점 더 보수화되어 가는 것과도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1. 함께 하는 '공부'가 곧장 '관계'로 연결되던 때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함께 '공부'를 하지 않으면 '관계'를 맺지 못하던 그때, 나는 늘 날이 서 있었고, 만나는 거의 모든 이들에게 '직구'를 던졌다. 교수에게도, 선배에게도, 후배에게도 나는 '강속구 투수'였다. 실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탓에 구속이 좀처럼 나오지 않은 그저 테크닉이 부족한 불펜 투수에 불과했지만, 정규적으로 마운드에 설 수 없는 '불펜 투수'라는 그 정체(停滯)감이 자세를 더욱 경직되게 만들었다. 그렇게 늘 '마운드'에서 볼을 뿌리는 선발 투수의 자세로 '공(말)'을 뿌렸다. 그 미숙한 투구에 몇몇은 상처를 받았고 몇몇은 맞서서 직구를 던졌고 또 몇몇은 현명하게 내 몸과 말을 잡아주었다. [최근의 내 발언의 상당 부분이 과거형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그렇게 공부로 맺어진 관계가 삶의 반경을 넓히는 '활동'의 문맥으로 확장된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모여서 하는 공부가 늘 그렇듯-특히나 인문학 관련 대학원생들의 경우엔 더더욱!-이런 저런 의견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어떤 이는 떠났고 어떤 이는 남았다[어떤 이는 기꺼이 남았고, 어떤이는 떠나지 못해 남았다]. '활동'과 '공부'의 거리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 듯해 <자율 서평회>라는 세미나를 만들어 함께 책을 읽었다. 함께 하는 공부에서 그저 책만 읽는 것은 죽기만큼 싫어하는 '나인 터라' 책을 통해 버릇과 습관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이 글은 학부생부터 박사수료생이 함께 하는 세미나에서 내가 읽고 느낀 것들을 거칠게 기록한 것이다.
2. 모든 글에는 나름의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내 지론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방식이 꽤나 문제적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도발적'인 문제제기가 어떤 강박이나 보상심리 같은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해보지만 명쾌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대화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와의 위태로운 동거 관계에 있다는 사실 또한 직감하게 된다. 혹자는 내게 '후배'가 없다고 했지만, 대학원에 공부를 하는 대학원생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긍정적인 의미의 '선배-후배' 관계 또한 사라지고 있다는 슬픈 변명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본다. 대개가 영리하게 관계를 매매하고 사적 이득을 좇아 몸과 마음을 움직일 뿐이다. 어찌된 일인지 관계에 미숙한 이들이 없다. 다들 '나이스' 하게 할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정확하게 분별해내고 무엇이 유리한 것인지 판명한다. 그 '나이스'함이 흉물스러운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유연함'에 대한 부러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뭔가를 배우려는 이들은 줄지 않지만 그 배움을 통해 관계를 바꾸려는 이들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말들을 푸념처럼 늘어놓으며 '꼰대'가 되어간다. 이 글이 '꼰대 인증'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몇 안 되는 이들과 일희일비하고 아웅다웅하는 것을 멈추고 내가 터해 있는 공간과 관계망을 통해 한국 인문학 담론장의 문맥을 읽어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의미가 적지 않다. 물론 무책임한 규정처럼 보이는 대목이 적지 않지만 논리를 갖추지 못한 직감을 서둘러 기록해둠으로써 기왕의 내 글쓰기와 다른 문맥들을 만들어보고 싶다.
3. 후속 세미나로 '이진경'의 새 저서를 '함께' 읽었다. '이진경이라는 기표'를 통해 한국의 인문학장의 읽어가며 이 글의 문제 의식을 조금 더 밀고 나갈 수 있었다. 그 기록도 조만간 정리해서 올리고자 한다. 그 전에 마감해야할 원고가 두 개다. 소소하게 써야할 글도 2-3개가 더 있다. 원고지 10매 짜리 글에 대한 기획도 만들어내지 못해 쩔쩔매던 시간이 유독 많았던 2011년이지만 요즘 같아서는 뚝딱뚝딱 써낼 수 있을 것처럼 '어깨가 가볍다'[힘들게 썼던 이선형 시집 해설의 덕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일시적인 각성 효과 같기도 하다]. 물론 [체계의] 피로는 여전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부족하나마 '읽고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읽고 쓰면 당연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는 걸보니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하고 있거나 읽고 쓰는 것이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 시류 탓이지 싶다. 그렇게 편히 생각하고 조금 더 읽어야겠다. 여전히 좋은 글보다는 좋은 말들을 더 많이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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