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통당하다 : 죽음과 말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아니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강물처럼 시간은 언제나 인간을 빠져나간다. ‘빠져나간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관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좀처럼 제 자신을 내어주지 않지만 시간만은 인간을 뚫고 지나간다. 시간은 인간을 관통한다.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시간에 관통당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관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간이 화살처럼 인간을 뚫고 지나갈 때 개별 존재는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 자각하게 된다. 인간의 ‘자각’이 ‘관통「당」하는 순간’에만 찾아온다는 것을 상기해보라. 어떤 자각인가? 인간이란 ‘죽음 앞의 존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시간의 관통을 피할 수 없다는 존재의 겸허함을 가리킨다. ‘자각’이란 바로 (존재의) ‘겸허함’을 얻는 순간을 일컫는다.
시간에 관통당한 인간은 죽음에 이르게 되지만 그 대가로 ‘말’을 얻기도 한다. 인간은 기꺼이 시간을 말과 바꾸는 자들이다. 죽음의 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밤마다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세헤라자드’를 떠올려 보자. 그녀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매일 밤 죽음과의 대면을 통해서 이야기를 ‘얻었던 것’이라 바꿔 말할 수 있다. 죽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비로소 이야기를 하나 둘 얻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과 말의 교환을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세헤라자드’는 ‘이야기[말]’로 ‘시간’을 붙들[지연시키]고자 한 인간, 바로 소설가의 운명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말’이란 존재가 시간에 관통 당한 ‘흔적’이다. 그러나 ‘말’은 축적되지 않고 순간 속으로 휘발되어 사라져버리고 만다. 물론 ‘말’이 기억이라는 공간에 ‘각인(刻印)’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새김(刻)’과 ‘박음(印)’을 통해서만, ‘문자’의 형태로만 가능하다.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지면에 안착하는 말, 축적되는 말이 필요하다. ‘쓴다는 것’은 존재를 관통해 지나가버린 시간[순간]의 ‘흔적’을 축적하는 행위라고 할 때, 그것은 존재가 언제나 죽음 앞에 놓여 있다는 개별자의 한계를 가리키며 동시에 그 한계[죽음]를 넘어가려는 불가능을 향한 도약 행위라 바꿔 말할 수 있다.
모든 이야기에서 ‘시간[순간]의 사체(死體)’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소설가는 ‘이야기의 공간’ 속에 시간을 붙들어두고자 하지만 남는 것은 흔적뿐이기에 그 노력은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다만 이미 지나가버린 순간과 순간을 이어 새로운 시간(소설적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지난 날 사체들의 부분을 교직하여 또 다른 생명체를 만들어내려고 했던 도약(‘프랑켄슈타인’)이 ‘소설’이라는 양식을 통해 재현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설가는 골절된 시간의 마디와 마디를 봉합해 ‘죽음 앞의 인간’이라는 현실의 조건을 넘어가려 애쓴다.
그런 점에서 우경미가 ‘기억’을 소설의 중요한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데, 문제는 이 자연스러움이 상투성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 차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내용은 우경미의 소설 속에 ‘하고 있는 말’보다 ‘하지 못한 말’의 힘이 더 세다는 데 있다. 소설의 화자들은 상대에게 말을 하기 위해 고심하지만 그 고심은 대개 상념으로 머무르거나 상대에게 가닿기 전에 휘발되어버린다. 많은 소설들이 고백체나 서간체의 형식을 즐겨 취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밀한 말들은 수신자에게 가닿지 못하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발신지로 돌아오기 일쑤다. 보내지 못한 편지가 발아래에 수북이 쌓이는 것, 이것이 우경미의 소설 쓰기다. 이때, 아직 수신자에게 가닿지 못한 ‘봉인되어 있는 편지’는 우경미 소설의 특징을 푸는 열쇠말이 된다. 그녀는 쉼없이 편지를 쓰지만 정작 편지를 보낼 수 없다. 답장을 받을 수 있는 주소(장소)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주소 없음, 발신지불명
존재가 시간에 관통당한 흔적을 ‘말’이라고 했다. 쓴다는 것은 휘발되어버리는 ‘말’을 ‘문자’로 바꾸는 작업이며 그것은 ‘말의 정박지(碇泊止)’를 마련하는 것이다. 휘발되어 사라져버릴 ‘말’을 캐내고 가꾸는 노동의 수행을 통해서만 ‘말의 장소’가 구축될 수 있다. 소설가란 저마다가 일구고 있는 ‘말의 장소’를 통해서만 가질 수 있은 이름이다.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서사)는 ‘말의 장소’를 출처로 가지게 되며 모든 문장은 제 각각의 ‘주소지’를 가진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 ‘주소지’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그저 읽는 이가 아니라 소설의 장소, 그 주소지를 향해 접근해가는 길을 개척하는 이를 가리킨다.
저마다 부려 있고 있는 말과 어휘가 다른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노력의 여부에 의해 좌우된다고 간주하기 쉽지만 실은 ‘말의 장소’가 다르기 때문이다. ‘말의 장소’란 개별자의 예술적 감각이나 능력보다 ‘삶의 반경’에 보다 큰 영향을 받는다. ‘삶의 반경’이란 개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아닌 한 개인을 둘러싼 구조와 환경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문장’도 홀로 쓰는 것이 아니다. 문장을 쓴다는 것은, 아울러 문장과 문장을 접속시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정확하게 문장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말의 장소’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평생을 살아도 알 수 없고, 쓸 수 없는 문장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문장의 반경’을 개인의 ‘실착’이나 ‘빈곤’으로만 치부될 수 없다.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라는 범박한 규정이 여전히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 판단은 ‘문학성’이라는 심급에 의해 결정되는데, 문제는 ‘문학성’이 문학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신화적 체계를 통해 구축되는 대단히 모호한 규정이라는 데 있다.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 판단과 이를 바탕으로 규정되는 위계를 ‘문학성’이 아닌 ‘말의 장소’의 차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성이 요청된다. ‘말의 장소’란 ‘삶의 반경’과의 상호 교섭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기에 ‘문학성’이라는 신화적인 가치 체계로 작품을 손쉽게 규정하는 것이 아닌 문학과 삶의 접점에 작품을 놓아둘 수 있는 공간이 새롭게 열리는 것이다. 이 공간은 소설 독해의 새로운 장이기도 하다. 증상적인 독법이 바로 그것이다.
우경미 소설의 ‘장소’, 그 ‘주소지’를 파악하는 데 이러한 증상적인 독법이 요청되는 것은 그가 구축하고 있는 많은 소설들이 ‘이방인의 어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란 ‘토지 소유자’가 될 수 없는 이를 가리키지 않는가. 달리 말해 ‘무장소성’을 체현하고 있는 이들이 이방인인 것이다. 이 무장소성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의 부재나 결여뿐만 아니라 ‘상징 형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단적으로 공동체에 안착하는 문자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문자를 가지지 못하기에 이방인은 표현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방인은 ‘내면’을 가질 수 없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근대 소설에서의 내면이란 그저 모든 구성원들이 선험적으로 지니고 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민족(nation)과 국가(state) 그리고 자본(capital)의 결합이 개별자들의 ‘내면’을 만들어낸다. ‘상상된 공동체(imaged community)’의 경계선이 바로 내면인 것이다.
앞서 우경미의 소설이 ‘하고 있는 말’보다 ‘하지 못한 말’의 힘이 더 세다고 한 것은 이러한 문맥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결여’로 간주될 수 있는 요소를 ‘어법’이라는 특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경미가 묘사하고 있는 공간과 인물들이 구체성과 디테일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노출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의 어법’이 발현되는 ‘장소’ 위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이때 우경미의 몇몇 소설이 고백체나 서간체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단순한 소설적 기법이 아니라 ‘이방인의 어법’이 표출되는 방식에 가깝다. 상대에게 말을 전하는 방식을 소설 전면에 드러내고 있지만 그들의 말은 수신자에게 가닿지 못한다. 그 이유는 수신자의 주소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게 발신자가 주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발신지불명’의 편지를 보내는 사람, 내면을 가지지 못한 자의 독백. 일견 자폐적이거나 낭만적인 정조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말하기 방식을 서둘러 ‘문학적 한계’라 규정지을 것이 아니라 증상적 독법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이방인에게 주어진 ‘삶의 반경’ 위에서 가능한 발화 방식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과 대면할 수 있게 된다. 우경미의 소설은 우리들로 하여금 ‘결여’를 ‘질문’으로 바꾸는 관점의 전환을 요청한다. ‘주소 없음’과 ‘발신지불명’을 근간으로 하는 ‘이방인의 어법’은 이방인의 서사가 국경을 종횡무진 횡단하는 ‘탈국경적 문맥’만이 아니라 바로 이 증상적인 어법의 특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정이 이러할 때 우경미 소설의 증상적인 어법을 통해 이방인 작가의 계보를 이어가는 단초를 잡아낼 수 있는 것이다.
3. 이방인의 언어 : 나비, 마술, 바람
사랑은, 아니 ‘관계’는 우경미 소설의 발생지이다. 대개의 소설이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을 서사축으로 하고 있음에도 성애적 묘사나, 신체에 관한 묘사가 드물다는 것이 함의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억’이 구체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우경미의 소설쓰기의 중요한 특징으로 읽힌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과거의 회상을 통해 지금-이곳의 자리를 마련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성과 디테일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우경미의 소설적 특징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
“나비는 화석이 되기 힘들대요.”
“왜요?”
“날개가 너무 약하고 부드러워서······ 화석이 되기도 전에 사라진대요.”
―「나비들의 시간」, 34쪽
‘나비’가 ‘화석’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들의 기억은 공동체 내부에 안착하지 못한다. 문자의 형태를 얻지 못하는 기억들, 국경 내부에 정주하지 못하는 기억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문자(화석)가 되지 못하는 기억(나비)이 외려 소설을 쓰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필요가 있다. 우경미 소설 속의 기억이 희미하고 불투명한 것은 그 기억들이 공동체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경미에게 있어 소설 쓰기란 환원불가능한 기억(나비)을 문자(화석)로 번역하는 것이 아닌 환원불가능 그 자체를 반복해서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그것은 우경미의 소설이 ‘공동체의 언어’가 아닌 ‘이방인의 언어’를 구사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녀는 오래 전부터 문자보다 기호가 편한 사람이었다”(12쪽)는 이 한 문장 속에 이방인의 문장 속에 내장되어 있는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기억에 특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 기억이 ‘문장의 형태’가 아니라 ‘기호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언어는 문자가 아닌 기호에 가깝다. 우경미 소설 속 인물들의 기억에 구체성과 디테일이 결여되어 있는 이유 또한 그들이 문자가 아닌 기호를 통해 지난 시간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뒤를 돌아다보는 게 현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내려오지 않는 천국」, 217쪽)라는 대목을 경유해볼 때 기억이 기호의 형태로 재현된다는 것은 자신의 현재적 위치 또한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간체 형식으로 구성된 「바람의 말」이 수신자에게 가닿지 못하는 것은 발신지에서 타전하는 언어가 특정한 주소지에 안착을 목적으로 씌어지는 ‘문자의 형태’가 아닌 ‘기호의 형태’(바람의 말)를 취하고 있는 탓이다. 우경미 소설 속의 인물들은 구체성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설사 이국(異國)을 떠돌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들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것은 공동체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억은 국가와 민족을 경유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사적이거나 사소해보이는 기억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재현하는 인물들은 국경 내부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이라 바꿔 말할 수 있다. 문자로 환원되지 않는 기호들로 채워진 시간, 그러나 그 결여가 소설 쓰기의 동력이 발생하는 진원지이기도 하다는 역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여러 소설 속에 ‘불임의 모티프’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 또한 공동체에 안착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언어라는 문맥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인물들 사이 갈등의 원인이 되거나 서술자의 트라우마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는 ‘불임’은 정확하게 ‘재생산 불가능성’을 가리킨다. 화석(문자)이 될 수 없는 ‘나비의 시간’과 신기루와 같은 마술이 이루어지는 ‘섀도박스’라는 공간, 그리고 수신자에게 가닿을 수 없는 ‘바람의 말’이 우경미 소설을 구성하는 3가지 요소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배면에 문자로 환원되지 않는 기억이, 반복해서 사산되기만 하는 기억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경미의 소설은 바로 이 사산되는 기억의 흔적, 이방인의 기호를 재현하기 위한 고투의 산물인 것이다.
4. 소설가의 자리 : 응답의 장소
“부음 기사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 쓰는 사람”(「펠리컨은 없다」, 112쪽)이란 우경미 소설 쓰기의 중요한 특징을 가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들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함께 사는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개별자들의 죽음을 공동체에 귀속시킴으로써 애도의 성공적 완수를 소설의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합법적 묘소를 마련함으로써 애도불가능성을 소설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음을 가리킨다. 우경미 소설 속에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은 이방인의 언어가 애도불가능성을 기본 속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공동체의 것이 아닌 자신의 몸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기에 이방인의 언어는, 그의 몸은 타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사마귀가 제 어미 살을 파먹고 자라듯 살뜻히 남의 손가락에 의지해 육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몸부림쳤다. ···(중략)···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문대고 누르고 잡아당기기를 거듭하는 동안 어깨의 통증도 차츰 나아갔는데 그에 따라 그의 중요성도 옅어져 갔음을 인정해야겠다. 더불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게 됐다.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미래가 그 속에 있었다.
―「내려오지 않는 천국」, 213쪽
“안녕하씸니까!”라는 ‘낯선 인사’를 첫 문장으로 하는 「내려오지 않는 천국」은 우경미 소설집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소설이기도 하다. 이국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과 그 사이에 완성되는 장편 소설을 서사축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 속에 우경미 소설 쓰기의 중요한 측면이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소설 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작가적 자의식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는 위치와 타인과의 만남이라는 사건 속에서 시작된다는 데 있다. 인용하고 있는 대목에서 소설 쓰기란 자신의 몸을 타인의 손에 맡길 때 가능 하다는 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 쓰기를 통한 미래의 구축 또한 바로 타인과의 접촉에 의해 가능하다는 사실은 놓쳐서는 안 되는 우경미 소설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쓴다는 것에 대한 혼란을 덤덤하게 기록하고 있는 대목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려오지 않는 천국」에서 우리는 소설가의 운명 또한 얼핏 엿보게 되기도 한다. 헛된 열망을 쫓아 유랑자가 된다는 것(“끊임없이 파도치는 의식의 맨 밑바닥엔 정작 중요한 것은 내팽개치고 헛된 열망만을 쫓아다니는 어리석은 유랑자가 나인지도 몰랐다”, 203쪽)은 곧 쓰는 것이고, 그것은 소설가를 가리킨다고 해도 좋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선명하게 녹아 들어 있는 이 소설은 우경미가 쓰는 ‘자전 소설’이며 동시에 ‘소설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자전 소설과 소설에 관한 질문이 겹쳐 있다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우경미가 그 겹침을 작가적 자의식의 혼란이 아닌 타인과의 만남으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당신의 아내는 남편과 아들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죽음이 유감스럽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했다. 생활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말들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려오지 않는 천국」, 221쪽.
조선족 출신의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맡겼을 때, 비로소 ‘쓰기’가 가능해진 것처럼 ‘나’가 우연히 만났던 노인과 나누었던 말을 유족들에게 대신 전하는 위의 대목은 ‘이야기’란 결국 타인을 경유할 때만 가능하다는 관점이 녹여 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의 손길에 의해 구원된 이(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된 ‘나’)가 또 다른 손길[이야기]로 누군가를 구원한다. 우경미에게 이야기란 타인과의 접촉과 다르지 않다. “조막만 했지만 잽싸게 쓸어내고 닦고 깨진 조각을 이쪽저쪽으로 맞춰보고 하다못해 말총머리로 먼지 따위를 훔치곤 했던. 그것이 그녀 삶의 밑천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221쪽)는 대목은 의미심장한 것일 수밖에 없는데, 그 노인에게 ‘손길’이 삶의 밑천이었던 것처럼 ‘나’의 밑천이란 바로 ‘이야기’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이야기인가? 문자가 될 수 없는, 지면에 내려앉을 수 없는 기억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흡사 ‘내려오지 않는 천국’과 같은 것인데, 우경미에게 소설 쓰기란 바로 지면 위에 안착할 수 없는 이방인의 언어를 재현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공동체 내부에 장소를 가지지 못하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 우경미 소설에 ‘국가’나 ‘사회 구조’보다 (사적)‘관계’가 우위를 점하는 것은 이러한 문맥 위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국가’가 아닌 사적 관계가 우위에 있는 소설이란 자아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자폐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탓에 ‘결함’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설 쓰기가 국경 내부의 언어(문자)가 아닌 이방인의 언어(기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증상적인 글쓰기’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문학성이라는 신화적인 잣대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특이한 궤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주목해보자.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에 대한 반성(“어쩌면 내 거짓 낭만도 같은 선상에 놓여 있으리라. 소설 속의 내 낭만도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도리어 쓰디썼다. 자학적 성향도 짙었다. 거짓 낭만이라도 좋으니 꿈이여 와라. 소설을 쓰는 동안 화두처럼 붙잡고 있던 부분이었다”, 225쪽)과 그 반성 사이를 뚫고 아이가 들어선다. 이때 “현관물을 따고” 들어오는 아이는 혈연적 관계로 맺어져 있는 내부자가 아니라 외부에서 틈입해오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전화벨’에 가까운 타인이다. 우경미에게 소설 쓰기란 자신의 메시지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발신자가 아닌 누군지 알 수 없는 전화벨에 응답을 하는 수신자의 자리에서 마련되는 것이다. 이방인의 언어가 발신지불명이었던 것은 그 자리가 타인을 부르는 ‘호명’이 아닌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구축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1. 지난 겨울에 썼던 글을 뒤늦게 올려놓는다. 뒤늦은 이유는 너무 힘들게 썼지만 그만큼의 보람이 없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간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소설집이 출간된 듯한데, 편집자는 내게 아무런 연락이 없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본 내 글의 제목은 <우경미 소설을 읽고>였다. 나는 독후감을 쓴 게 아닌데 편집자는 내 글에 독후감 제목을 붙이면서 내게 어떠한 상의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이 책을 실물로 보지 못했다.
2. 긴 시간동안 마감을 하지 못했던 것은 이 한권을 소설집을 읽으면서 때 아니게 너무 많은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고민할 게 그렇게 많지 않은 소설이고, 단순한 소설이며, 낭만적인 정조가 자주 거슬리는 소설이었기에 '우딱' 써야만 '마감'을 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다. 나는 '우딱' 써버릴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마음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어째서 이 '해설'을 후딱 써버릴려고 했었는가, 왜 이 소설을 보자마자 단순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이 자꾸 나를 들볶았다. 예정된 시간에 글이 오지 않는다고 편집자도 나를 들볶았다. 생애 첫번째 소설집 출간을 기다릴 작가를 생각하니(작가는 지금 영국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재본한 소설집을 4번, 5번을 읽다보니 난 데 없이 편집자로 빙의하게 되어 교정도 꼼꼼히 보게 되었다. 마감을 하지 못했다. 해설의 중요한 축을 작품에 대한 독해보다(책 뒤에 붙은 이상한 글인 '해설'은 소설을 돋보이게 하고 미리 잘 읽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왜 나는 이 소설을 단순하게 생각하게 되었는가'로 바꿔 잡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다소 장황한 서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러한 고민 때문이다. '문학성'이라는 신화에 점철되어 있는 '나'를 발견했고 이 작품을 세밀하게 읽어내면서 그런 나를 수렁에서 건져내보려고 했다. 글을 쓰는 내내 내가 잊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이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한 작가의 소설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문학성'이라는 모호한 가치가 아니라 글쓴이가 놓여 있는 '삶의 반경'이라는 데 있다. 추상적인 수준 밖에는 되지 않겠지만 영국에 체류하고 있는 작가에 대해, 영국에 가게 된 경위에 대해, 명징한 서사를 가질 수 없었던 어떤 삶의 궤적에 대해 생각했다.
3. 해설이라는 기묘한 형식의 글에 아직까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문청 시절' 쉽게 읽을 수 있었던 글들이 대개가 '해설'류였기 때문일 터이고(그래서 해설엔 밤늦도록 홀로 도서관에 남아 소설을 읽던 그 시절의 어떤 로망이 있다), 첫번째 독자로서 작품과 대면하여 '의미화' 하는 성취감, 혹은 그러한 의미화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싶은 허영이나 자족적인 공명심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의 해설을 쓰면서, 그리고 그렇게 쓴 해설을 이곳에 뒤늦게 올려두면서 '해설'이 무엇인지, 내가 '그것'을 무엇으로 간주하고 있는지를 얼핏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게 '해설'은 '문학' 혹은 '소설'과 등가적인 층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뒤늦에 이 글에 대해 작은 의미 부여를 하자면 '하나의 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다.
4. 나는 '해설'에서 걸어나가야 한다. '문학'에서 걸어나가야 한다. 그렇게 걸어나갈 수 있을 때, 비로소 '문학'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 글을 틈틈이 적으며 오늘 오후 <반反/半문학론>이라는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메모를 남기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글이었다.
'던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름 없는 부대낌의 노동 (0) | 2012.07.15 |
---|---|
벌레들의 시간 (0) | 2012.03.27 |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얼굴' (0) | 2012.03.08 |
작은 것들의 정치 : 오늘, 우리는 '급진적 정치'라는 '야동'을 끊을 수 있는가? (0) | 2011.11.24 |
어두운 시대의 '어휘'들 (0) | 2011.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