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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163

일요일 아침 자다깨어 범죄의 전말을 실토해야하는 취조실의 용의자처럼, 그럼에도 결코 '전말'을 진술할 수 없는, 그러나 '전말'을 구축할 수 없는 바로 그 사실이 그가 범인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취조실의 구조' 속에서 떠올린 몇 마디의 생각, 골절된 생각, 떨어지지 않고 너덜거리는 생각, 아직 아무 것도 아닌, 그러나 거의 전부인 바로 그 생각, a. '삶의 반경'이란 선택지의 다양함이나 물리적인 공간의 확장 유무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지속력'을 통한 '자기 확신'(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기 확신은 자기 확장과 이어진다)의 정도를 의미한다. 문제는 얼마나 더 집중할 수 있느냐이고 얼마나 더 많은 에너지를 투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늘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느.. 2011. 7. 24.
떨림과 견딤 1. 긴 시간 비가 왔고, 나는 내내 빗소리를 들었다.* 구경하고, 듣기만 했다. 운동화는 젖지 않았다. 열어둔 창문으로 빗방울이 들어와 재본한 책들이 흠뻑젖어버렸다. 그쪽에 머리를 놓아두고 잤던 나 역시 젖었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깨지 못/않고 내내 잠만 잤다. 연구실에 습기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조미김을 먹으면서 알았다. 밥을 먹기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방금 뜯은 김이 금새 눅어져버렸다. 내게 연구실이 덥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에어콘을 한번도 틀지 못한 이번 여름동안 덥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거 같다. 그게 내 문제다. 김이 놀라울정도로 빨리 눅어버리는 것을 보고 연구실에 습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 2. 무더위와 무관하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시절이다. 내게 쏟아지는.. 2011. 7. 11.
어떤 편지, 그리고 어떤 보병 뒤늦게 받은 답장. 그러나 나는 그곳에 없었다. _시인 진은영으로부터 2011. 7. 5.
2011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 그렇기 때문에 잊어서는 안 되는 날 1. 종일 연구실 문을 열어 두고 있었다. 에어콘이 고장나서가 아니라, 그저 문을 열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그렇지만 나는 내가 거주하는 곳의 문을 거의 열어두지 않는다. 며칠 간 연구실 문을 열어두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듯했고 마지 못해 아는 척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했다. 요며칠 문을 열어두고 음악을 들으면서 논문 몇 편을 읽고, 한 시인이 보내준 시 몇편을 읽고, 보다가 둔 소설도 몇 장 읽었다(정확하게는 화장실에서 읽었다). 2년전에 발표했던 논문 한 편을 학술지에 투고하기 위해 손 보았고, 남은 시간은 대개 업무를 보는 데 보냈다. 종일 연구실 문을 열어 두었고, 자꾸만 그러고 싶었다. 2. 언젠가, 청탁 원고를 더 이상 받지 않고 시집 해설만 한달에 두 편,.. 2011. 7. 5.
2011년 4월 24일 초저녁에 잠이 들어 새벽 3시에 깨었다. 김형술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번의 벨소리 후에 바로 끊어졌는데, 저녁에 보낸 메시지를 그제서야 확인했나 짐작했지만 아직 메일을 확인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를 했던 것일까. 어제 밤에 마감한 2호에 실릴 원고를 다시 읽어봤다. 서울에 체류 중에 k 선생께 「문장과 얼굴」이라는 제목을 한 그 원고를 첨부한 메일 한통을 보냈다. mono의 음반을 들으며 이세기 시인의 시를 읽었다. 「서쪽」이라는 시를 읽으며 며칠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내 아버지가 발톱을 깎아주는 꿈이었는데, 너무 짧게 자르는 것만 같아 엄지 발가락 발톱만을 자르고 도망치는 꿈이었다. 그게 후회되었다. 조금 아프더라도 다 자를 걸, 뒤늦게 후회되었다. 서쪽 이세기 그해에는 삼월에.. 2011. 4. 26.
20xx년 x월 x일 붉게 부풀어 오른 도톰한 입술은 미끈한 상처다. 입술은 상처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딱지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끝에 획득한 매끈하고 볼륨 있는 피부다. 그러나 매끄러운 딱지가 사람들의 기억까지 덮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쉬지 않고 자신의 입술 끝을 물어뜯었으며 타인의 입술을 빨거나 자신의 입술을 타인에게 내맡기는 데 집중했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입술의 자리에 있던 상처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자신과 타인들의 타액에 입술은 점점 더 매끄러워져 갔고 도톰해져갔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입술을 사랑했고 또 볼륨감을 더 해 가는 자신들의 입술에 만족했다. 꼭 그만큼 상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만 갔다. 기억은 머무를 곳이 없었다. 그러나 기억은 잊혀져도 .. 2011. 4. 25.
2011년 4월 23일 누가 들를까 궁금했던 레코드점이 결국 문을 닫기로 한 모양이다. 입구에 ‘CD, 테잎 세일’이라는 문구를 본 기억을 떠올려 오전에 기어이 그곳에 들렀다. 1시간동안 남아 있던 모든 CD를 확인하고 25장 정도의 앨범을 구매했다. 지금껏 구입한 CD보다 더 많은 수의 앨범에 대한 터무니없는 가격을 치루며 주인 아저씨께 이제서야 앨범을 구매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괜찮다며 물수건을 건네주셨다. 일회용 물수건으로 손바닥을 훔치니 검은 때가 잔뜩 묻어나왔다. 검게 변해버린 물수건을 가게 휴지통에 버리지 못하고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검은 봉지에 한가득 CD를 담아 레코드 가게를 몰래 빠져나왔다. 내 손에 잔뜩 묻어 있던 그 검은 때가 부끄러웠다. 2011. 4. 25.
2011년 4월 21일 서울에서 세희가 내려왔다. 늘 내려오는 길에 연락을 하는 그 버릇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제는 적응이 좀 된 듯하다. 마감을 훌쩍 넘은 원고를 뒤로하고 새벽까지 통음을 했다. 오랜 시간 방치해 놓은 내 방이 부끄러웠지만 세희를 내 자취방에 재우고 다시 연구실로 올라와 원고를 쓰다가 잠들었다. 주인도 돌보지 않은 방으로 돌아가 하룻밤 손님이 남겨 놓은 흔적을 보니 괜실히 슬퍼졌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샴푸 빈 통과 비눗물로 가득 채워진 세숫대야, 탁한 물이 고인 변기. 내가 내 집을 내버려두었으니 손님 또한 그렇게 하룻밤의 시간을 내버리듯 떠난 것이다. 샤워를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샤워실 바닥에 끼어 있던 물때까지 깨끗하게 치웠다. 주방 한켠에 쌓아 두었던 쓰레기들 분리수거를 해서 밖에 내 두었다. 삼푸를 .. 2011. 4. 24.
불가능한 문장 문장은 안착할 곳이 필요한 터라 언제나 ‘뭍’에서 씌여지지만 그곳은 대개 ‘물’과 가까운 곳이기 마련이다. ‘말’은 어디든 자유롭게 오고갈 수가 있어 어디서든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자유로움은 정박지를 찾지 못해 쉽게 흩어져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도 지치지 않고 ‘말’을 하는데 여념이 없는지도 모른다. 문장은 물과 뭍 사이에서 출렁거리지만 한사코 물을 등지고 있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물에서 멀어지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한순간, 물속으로, 물의 너머로 제 몸이 빨려 들기를 바라는 심정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간곡한 문장은 하나의 단어나 토씨의 어긋남에도 저 스스로를 보존하던 기반을 모조리 잃어버릴 수도 있기에 그렇게도 정처없거나 불안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한 발이라도 헛딛는 순간 모든 것.. 2011. 1. 23.
저기요 저기요 : 누군가를 부를 때 쓰는 요긴한 말. 우리는 아직 이 말보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호명 방식을 가지지 못했다. 하여, 타인을 부르는 보다 요긴한 말을 새롭게 캐내거나 너무 자주 써서 한없이 닳어버린 '저기요'가 가진 의미의 심연을 발굴해낼 필요가 있다. 저기, 누군가가 있다. 가닿고 싶지만, 필시 가닿지 못하고 그 앞에서 바스러지고야 '말'. 저기, 누군가가 있기에, 속절없이 부른다. 그것은 첫 말, 다음 말을 기약할 수 없는, 오직 부름으로써 제 몫을 다해버리기에 '저기요'를 통해서는 결코 다음 말을 꿰낼 수 없다. 그것을 알지만 '저기요'는 얼마나 간곡한 부름인가. 저기, 누군가가 있다는 작은 사실 하나만으로 선뜻 태어나는, 맹렬히 달려가는, 말.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기에, 오직 부를 .. 2011.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