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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145

김반 일리히 일기(1) 콜라와 나쁜 생각 콜라를 마시겠다 결심한 것은 아마도 나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학교로 올라오면서 나는 별안간 아이스크림을 생각하게 되었다. 밥을 먹을 땐 물을 마시거나 국물을 잘 마시시 않는 나이지만 오늘은 식당에 앉자마자 물 한 잔을 비웠고 식사를 마치고 입안을 청소하기 위해 머금은 한모금은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양이었다. 목이 탔다. 그래서 나는 나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아니 나쁜 마음을 가졌던 탓에 목이 탔을 수도 있겠다. 아이스크림을 떠올렸고, 무수히 많은 아이스크림에 질려 더 나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콜라를 마시기로 했다. 진작에 그 생각을 했으면 집 앞 우리마트에서 콜라를 살 수 있었을 것을, 온통 편의점으로 둘러 싸인 곳에서 나는 콜라를 골라 마시겠다는 나쁜 .. 2012. 2. 25.
핸드폰은 고장나지 않는다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한 일주일동안, 내 핸드폰은 고장 났었지만 나는 핸드폰을 쓰는 버릇, 핸드폰이 만든 세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핸드폰적 구조'란 핸드폰이라는 기기가 만들어내는 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핸드폰적 구조는 개별자들의 행위 양식과 그 양식의 관계를 결정하는 '테크놀로지의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핸드폰'이라는 항에 문제가 생기면 '컴퓨터'라는 항이 이를 대체한다[컴퓨터를 통해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고 내게 수신되는 문자의 내용도 알 수 있다. 물론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있을 때에 한에서]. '나의 핸드폰'이 고장나면 '너의 핸드폰'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고장 난 나의 핸드폰은 '정지'해 있지만 너의 핸드폰의 사용빈도가 그 고장과 정지를 대신해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 흡사 보.. 2012. 1. 22.
일요일 아침 자다깨어 범죄의 전말을 실토해야하는 취조실의 용의자처럼, 그럼에도 결코 '전말'을 진술할 수 없는, 그러나 '전말'을 구축할 수 없는 바로 그 사실이 그가 범인임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취조실의 구조' 속에서 떠올린 몇 마디의 생각, 골절된 생각, 떨어지지 않고 너덜거리는 생각, 아직 아무 것도 아닌, 그러나 거의 전부인 바로 그 생각, a. '삶의 반경'이란 선택지의 다양함이나 물리적인 공간의 확장 유무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지속력'을 통한 '자기 확신'(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기 확신은 자기 확장과 이어진다)의 정도를 의미한다. 문제는 얼마나 더 집중할 수 있느냐이고 얼마나 더 많은 에너지를 투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늘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느.. 2011. 7. 24.
떨림과 견딤 1. 긴 시간 비가 왔고, 나는 내내 빗소리를 들었다.* 구경하고, 듣기만 했다. 운동화는 젖지 않았다. 열어둔 창문으로 빗방울이 들어와 재본한 책들이 흠뻑젖어버렸다. 그쪽에 머리를 놓아두고 잤던 나 역시 젖었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깨지 못/않고 내내 잠만 잤다. 연구실에 습기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조미김을 먹으면서 알았다. 밥을 먹기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방금 뜯은 김이 금새 눅어져버렸다. 내게 연구실이 덥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에어콘을 한번도 틀지 못한 이번 여름동안 덥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거 같다. 그게 내 문제다. 김이 놀라울정도로 빨리 눅어버리는 것을 보고 연구실에 습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 2. 무더위와 무관하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시절이다. 내게 쏟아지는.. 2011. 7. 11.
어떤 편지, 그리고 어떤 보병 뒤늦게 받은 답장. 그러나 나는 그곳에 없었다. _시인 진은영으로부터 2011. 7. 5.
2011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 그렇기 때문에 잊어서는 안 되는 날 1. 종일 연구실 문을 열어 두고 있었다. 에어콘이 고장나서가 아니라, 그저 문을 열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그렇지만 나는 내가 거주하는 곳의 문을 거의 열어두지 않는다. 며칠 간 연구실 문을 열어두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듯했고 마지 못해 아는 척 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했다. 요며칠 문을 열어두고 음악을 들으면서 논문 몇 편을 읽고, 한 시인이 보내준 시 몇편을 읽고, 보다가 둔 소설도 몇 장 읽었다(정확하게는 화장실에서 읽었다). 2년전에 발표했던 논문 한 편을 학술지에 투고하기 위해 손 보았고, 남은 시간은 대개 업무를 보는 데 보냈다. 종일 연구실 문을 열어 두었고, 자꾸만 그러고 싶었다. 2. 언젠가, 청탁 원고를 더 이상 받지 않고 시집 해설만 한달에 두 편,.. 2011. 7. 5.
2011년 4월 24일 초저녁에 잠이 들어 새벽 3시에 깨었다. 김형술 시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번의 벨소리 후에 바로 끊어졌는데, 저녁에 보낸 메시지를 그제서야 확인했나 짐작했지만 아직 메일을 확인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를 했던 것일까. 어제 밤에 마감한 2호에 실릴 원고를 다시 읽어봤다. 서울에 체류 중에 k 선생께 「문장과 얼굴」이라는 제목을 한 그 원고를 첨부한 메일 한통을 보냈다. mono의 음반을 들으며 이세기 시인의 시를 읽었다. 「서쪽」이라는 시를 읽으며 며칠 전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내 아버지가 발톱을 깎아주는 꿈이었는데, 너무 짧게 자르는 것만 같아 엄지 발가락 발톱만을 자르고 도망치는 꿈이었다. 그게 후회되었다. 조금 아프더라도 다 자를 걸, 뒤늦게 후회되었다. 서쪽 이세기 그해에는 삼월에.. 2011. 4. 26.
20xx년 x월 x일 붉게 부풀어 오른 도톰한 입술은 미끈한 상처다. 입술은 상처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딱지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끝에 획득한 매끈하고 볼륨 있는 피부다. 그러나 매끄러운 딱지가 사람들의 기억까지 덮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쉬지 않고 자신의 입술 끝을 물어뜯었으며 타인의 입술을 빨거나 자신의 입술을 타인에게 내맡기는 데 집중했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고 입술의 자리에 있던 상처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자신과 타인들의 타액에 입술은 점점 더 매끄러워져 갔고 도톰해져갔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입술을 사랑했고 또 볼륨감을 더 해 가는 자신들의 입술에 만족했다. 꼭 그만큼 상처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만 갔다. 기억은 머무를 곳이 없었다. 그러나 기억은 잊혀져도 .. 2011. 4. 25.
2011년 4월 23일 누가 들를까 궁금했던 레코드점이 결국 문을 닫기로 한 모양이다. 입구에 ‘CD, 테잎 세일’이라는 문구를 본 기억을 떠올려 오전에 기어이 그곳에 들렀다. 1시간동안 남아 있던 모든 CD를 확인하고 25장 정도의 앨범을 구매했다. 지금껏 구입한 CD보다 더 많은 수의 앨범에 대한 터무니없는 가격을 치루며 주인 아저씨께 이제서야 앨범을 구매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괜찮다며 물수건을 건네주셨다. 일회용 물수건으로 손바닥을 훔치니 검은 때가 잔뜩 묻어나왔다. 검게 변해버린 물수건을 가게 휴지통에 버리지 못하고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검은 봉지에 한가득 CD를 담아 레코드 가게를 몰래 빠져나왔다. 내 손에 잔뜩 묻어 있던 그 검은 때가 부끄러웠다. 2011. 4. 25.
2011년 4월 21일 서울에서 세희가 내려왔다. 늘 내려오는 길에 연락을 하는 그 버릇이 못내 아쉬웠지만 이제는 적응이 좀 된 듯하다. 마감을 훌쩍 넘은 원고를 뒤로하고 새벽까지 통음을 했다. 오랜 시간 방치해 놓은 내 방이 부끄러웠지만 세희를 내 자취방에 재우고 다시 연구실로 올라와 원고를 쓰다가 잠들었다. 주인도 돌보지 않은 방으로 돌아가 하룻밤 손님이 남겨 놓은 흔적을 보니 괜실히 슬퍼졌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샴푸 빈 통과 비눗물로 가득 채워진 세숫대야, 탁한 물이 고인 변기. 내가 내 집을 내버려두었으니 손님 또한 그렇게 하룻밤의 시간을 내버리듯 떠난 것이다. 샤워를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샤워실 바닥에 끼어 있던 물때까지 깨끗하게 치웠다. 주방 한켠에 쌓아 두었던 쓰레기들 분리수거를 해서 밖에 내 두었다. 삼푸를 .. 2011. 4.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