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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144

새 것과 헌 것 오늘도 우당탕탕거리며 일터로 나섰다. ‘우당탕탕’이란 말엔 어떤 사연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게으름을 감추기 위한 호들갑에 지나지 않는다. 우당탕탕거렸다는 건 오늘도 눈뜨자마자 게으름을 피웠다는 말이다. 일터에 갈 땐 할 수 있는만큼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으려고 한다. 마침 깨끗한 양말이 없어 새 양말을 꺼내 신고 잰걸음으로, 아슬아슬하게 일터에 도착했다. 우당탕탕-게으른-잰걸음-지긋지긋한-아슬아슬. 오늘의 내 살림을 헤아려보다 새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의 줄기를 가지게 되었다. 새 것은 기분좋고 설레는 마음을 갖게 한다. 포장지를 뜯어 사용하지 않아도 든든하고 쾌적하다. 특히나 가난한 이들에게 새 것은 더 가지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형편만 허락된다면 더 많이 쟁여두고 싶은 것일테다. 심지어 쓰지 않.. 2022. 12. 1.
도둑 러닝(2)_달리기 살림 2021. 10. 27 언제나 그렇듯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가난한 프리랜서들의 공통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이 자기심문적인 질문은 자주 예고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곤 한다. 한창 러닝에 빠져 있을 때 ‘왜 달리는가?’에 대해 자주 묻곤 했는데, 뾰족한 답을 구하진 못했다. 다만 이 메타화의 과정이 피로하지 않았고 다소 흥미진진한 모험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즐기는 맘으로 이 질문을 품고 지낼 수 있었는데, 볕도 좋고 바람도 좋은 10월의 어느 날, 벌판을 달리던 수만년전의 인류가 떠올랐다. 빠르진 않았지만 그 어떤 동물보다 오래 달릴 수 있던 인류의 뜀박질에 대해서 말이다. 수년전 1일 1식을 하는 동안 허기를 넘어선 ‘텅 빈 상태’가 잠.. 2022. 10. 27.
도둑 러닝(1) 2021. 4. 20 미루고 미루다가, 며칠을 벼르고 벼르다가 나왔다. 날이 많이 따뜻해져서 반바지를 입고 달렸다. 미루고 미룬 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주치의라고 생각하는 한의원 선생님의 ‘땀을 흘리면 안 된다’는 단호한 처방을 어길 수가 없어서인데, 이성과 상식으론 납득이 되지 않는 처방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할 수도 없다. 러닝을 하면 아무래도 건강해지니 뛰고나면 좋다는 게 ‘상식’이지만 내 경우엔 달리고나면 건강을 걱정해야 할 판이니 이 속앓이는 누구와도 공유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의 달리기는 일탈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난 겨울, 달리는 동안 자꾸만 오정희의 을 떠올렸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은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생활에 공을 들이고 있어서 대개 밤 10-11시쯤에 달렸던 것과 .. 2022. 10. 27.
오늘 품고 있는 물음 : 수면 아래의 표정들 2022년 9월 19일 지난주 목요일 k작가와 저녁을 먹고 용두산 공원 근처를 산책했다. 오늘 홀로 그 산책로를 걸으며 옆에 k작가가 있었다면 무슨 이야길 했을까를 떠올려보았다. k작가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지만 지난 목요일 산책과 이어지고 있는 느낌도 분명해서 k작가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말을 해보고 작업실로 돌아와서 옮겨보았다. “요즘 품고 있는 물음은 뭔가요? 질문이라는 말이 조금 더 자연스럽겠지만 그건 (해)답을 떠올리게 하니까, 물음이라고 말하는 게 조금 더 정확할 거 같네요. 저는 요즘 ‘표정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어요.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다가 어느 사이에 떠오르는 것들. 그런 것들은 대개 변사체처럼 느닷없거나 경악스러운 것들에 가깝지만 꼭 그런 것만 있는 .. 2022. 9. 19.
오솔길 옆 작은 빛 2020. 3. 19 숲과 산은 말의 모양에서부터 갈래길을 품고 있다. 그 입구에 들어서면 누구라도 작은 망설임과 확신이 함께 한다.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긴장과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다는 확신이 걸음으로 교차할 때 발생하는 추진력은 기름 없이도 오래 타오르는 횃불과 다르지 않다. 잘 타는 재질이어서라거나 잘 타게 하는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잘 타오르는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산책은 갈래길조차 마다하며 사잇길을 찾아나서는 일상의 작은 모험이다. 모르는 길이라도 한참을 걸을 수 있고 누구나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까지 너끈히 감내해 낸다. 5분만에 사위가 밝아지거나 해가 지는 것을 목격했던 것처럼 눈깜짝할 사이에 꽃이 피기도 하고 몇걸음으로 길을 잃거나 길을 찾기도 한다. 뭐든.. 2020. 3. 22.
낭송 러닝 2020. 2. 27 다대포 2020. 2 2월 27일 저녁은 비를 맞으며 달렸다. 흩뿌리는 비여서 곧 그치겠거니 생각하며 달렸는데, 더 거세지진 않았지만 그치지도 않았다. 노면이 미끄러워 평소보다 더 긴장하고 달렸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다대포해수욕장을 돌아 복귀하는 길엔 잠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고 불길한 느낌의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부를 수 있는 구절만 단말마처럼 외쳐되는 형색이었던 터라 고라니 울음소리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괴성’은 지르면서도 곧장 중단하고 싶어진다.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익숙하지만 낯선 목소리와 함께 뛸 수 있다면, 시를 낭송하며 뛴다면? 외우는 시가 없어 곧장 시도 하진 못했지만 복귀하는 길위에선 .. 2020. 3. 8.
12월의 메모(1-계속) 2019. 12. 3 최상급의 발명가들 오늘도 편지 생각을 했다. 편지를 '써야 한다'와 편지를 '쓰고 싶다'를 왕복하다보면 한 통의 편지가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강철처럼 단련됨을 느끼게 된다. 단, 보내야 하는 편지는 빼고 보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보내는 편지 말이다. 해야 하는 일은 미루면서 하지 않아도 좋은 일에 열중하는 일처럼 말이다. 써야 하는 글을 끝내 미루고 쓰지 않아도 되는 글에 과잉 몰두하는 것처럼. 어쩌면 이것이 내가 누리고 있는 유일한 사치인지도 모른다. 펑펑 읽고 펑펑 쓰는 것. 매일 체중계에 올라가는 사람이 확인하는 요동치는 중량처럼 오늘 내가 누리는 사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비대하고 무겁다. 그 견딜 수 없음을 오랫동안 누려왔다. 보편적이지 않은 '최상급'을 홀.. 2019. 12. 8.
달리면서 하는 기도 ​2019. 10. 13 ​ 다대포 해변엔 어린 아이들과 어린 부모들로 가득했다. 아이가 없는 이들은 개와 함께 나와 있었다. 아이들보다 개들이 더 활달했고 그건 부모나 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잠깐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의 산책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무언가를 키우고 기른다는 건 한 '개체'와 우연한 관계를 이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종'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일요일 늦은 오후, 해변가로 몰려나온 사람들 모두가 오늘만큼은 검게 그을려도 좋다는 관대한 표정이었다. '종'에 관여하고 있는 이들의 자부심과 여유로 해변이 출렁였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잠시 멀미가 날 거 같아 빙글빙글 돌면서 해변를 빠져나와 도로를 향해 뛰었다.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고 내내 뛰었다. 언제나 5분 동안은 더 이상 달릴.. 2019. 10. 14.
가을 햇살 2019. 10. 9 좋아하는 것들,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파괴 하기. 오늘도 그 일을 한다. 부서질까 염려하며 두 손으로 매만지던 것을 불현듯 강하게 쥐어 터트려버리거나 애면글면 하며 보살펴온 것들에 고착되지 않기 위해 무심한척 애써 거리를 두다가 뜻없이 방치해버리는 일들. ‘나도 좀 살자’며 등을 돌리는 순간 숨이 멎어버리는 것들, 기지개를 켜자 파괴되는 것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영영 떠나버리는 것들. 말 없이 푸르기만 한 식물에 둘러 싸여 있는 것 같다. 짐작할 수 없는 방향으로 한없이 뻗어나가는 덩굴에 휘감겨 있는 생활에선 매만지는 모든 것들이 모욕적인 시선으로 돌아보는 것만 같다. 손수 지어 먹던 밥이 성의없는 한끼가 되고 아껴두었던 영화를 잠들기 전에 틀어놓고 자버린다. 보고 싶은 사.. 2019. 10. 9.
7월 생활글(1-3/계속) 2019. 7. 16[젓가락의 내러티브] 서울에서 친구가 왔다. 마침 와인과 맥주가 넉넉해 따로 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술안주를 만들었다.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먹은 음식의 목록. 순대볶음, 키위 두 개, 사과 한 알, 배 하나, 마늘빵, 라면 한 그릇, 핸드드립 커피 두 잔. 그리고 와인 세 병과 맥주 두 캔. 도착하자마자 세수는 하지 않고 이빨부터 닦는 건 여전하다. 사귄지 20년이 넘었지만 만날 때마다 생각지 못한 것들을 알아간다. 한 때는 무심하고 거친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굳이 드러내지 않는 세심함과 섬세함이 더 많이 감지된다.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마치 인덱스를 붙여가는 듯 차근차근 말을 풀어놓는 방식에 청량감을 느낀다. 관계 속에서 .. 2019. 7.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