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복하는 생활144

2月 (1-4/계속) 2019. 2. 15 2.0_강원도 어느 골짜기에서 얼음벽 등반을 한 뒤 쉬지 않고 한달음으로 온 세희와 함께 했던 1월의 어느 밤. 전과 달리 꽤 많이 바뀐 거실을 둘러보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내심 아쉬워하길래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낮은 탁자 하나와 미니오디오세트 외엔 아무것도 없었던 휑한 이전의 거실을 두고 도시 주거지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미니멀한 거실의 고유성이 사라졌다는 대답을 해왔다. 넓은 나무 테이블을 놓고 책장을 들여 서재에 쌓여 있던 책들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놓고서 이제서야 그럴 듯한 거실의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라져버린 거실의 고유성을 조용히 애도하는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 20년지기와 간만의 만남이 낯선 곳에서 도착한 사람과 하룻밤만 나눌 수 있는 대화를 하는 .. 2019. 2. 19.
아픈 사람―회복하는 사람―다른 사람 2018. 12. 19 종종 모임을 녹음해왔고 몇년간은 그 목소리를 다시 들으며 글로 정리해 공유하기도 했다. 내 목소리를 (견디며) 듣고 불필요한 말버릇을 고치기 위해 애를 써본적도 있고 부재하는 이를 염두에 두며 녹음을 하기도 했다. 그간 녹음 파일을 달라고 요청하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그 파일을 끝까지(혹은 제대로) 듣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자신이 있지 않았던 자리에서 나누었던 말들을, 기묘한 에너지가 교차하고 서로의 자아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혼란을 끝까지 듣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모임이 강의 형식이 아닌 참여하고 있는 여럿이 쉼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방식인 탓에 쓸데 있는 말보다 쓸데가 없어보이는 말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녹음 파일을 제대로 듣는다는.. 2018. 12. 19.
말의 영점, 몸의 영점 2018. 11. 27 유난히 길었던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퇴근한 시간이 10시 반.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구나라는 안도감보다 종일 뭔가 콱 막혀 있는 듯한 갑갑함을 견디는 게 쉽지 않다. 오늘은 종일 수업이 있는 날이고 그건 종일 노심초사 해야 한다는 것. 좀처럼 듣지 않고 끝내 말하지 않는 학생들을 두루 살피며 그럼에도 해야 할 말과 더는 할 수 없는 말들 사이를 줄타기 하듯, 어쩌면 줄다리기를 하듯 용을 쓰다가 탈출하는 마음으로 퇴근한 탓일까. 하루 이틀의 문제는 아니지만 오늘의 경색만큼은 털어내거나 뚫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말차 한잔을 마신 뒤 달릴 채비를 하고 나선다. 가만 더듬어보면 말의 문제이지 않았던가. 매주 강의실은 말이 죽어나가는 것을 묵묵히 목격해야 하는 참담한 현장이지 않는가. 엇.. 2018. 12. 2.
매일매일 부서지면서 배우는 것 2018. 10. 11 저녁 7시에서 8시가 되면 하던 일을 정리해야 한다. 이제는 7시나 8시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체육관에 가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군대 전역 이후로 제대로된 운동을 한번도 하지 않았지만(심지어 나는 군대에서도 족구나 축구를 한적이 없다) 지난 4월부터 거의 하루도 걸르지 않고 체육관을 나가고 있다. 뭔가 그럴 듯한 결심이 서서라기보단 어떤 끝을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으로, 출처를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조금은 강박적으로 체육관에 나가고 있다. 박사수료생이라는 (민망하고) 불안정한 신분과 1인 가족 생활의 적빈함이 누적된 탓도 없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별안간 꽤 과격한 운동을 시작했고 6개월 간 지속하고 있다. 십 수년만에 몸을 쓰다보니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2018. 10. 12.
꿈-기록(3) 0.1%의 희망 2018. 9. 12 점심을 지어 먹고 잠깐 선잠이 들었는데, 간만에 꿈을 꾸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링 위에서 잽(jab)을 내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꿈이었다. 늦봄부터 나가기 시작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가르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기본 원리를 숙지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몸으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몸을 움직여 반복연습하다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게 있다. 쉽게 익힐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아주 느리게 조금씩 나아진다는 것을. 5개월 동안 중요한 일이 아니고선 좀처럼 체육관 나가는 것을 빠지지 않았다. 운동을 하고 나면 1kg이 빠졌다. 제대로된 잽(jab)을 넣기 위해 매일매일 숨이 턱 밑까지 찬다. 아무것도 아닌 잽(jab)을 .. 2018. 9. 19.
말차(抹茶)를 마시며 2018. 4. 22 좋아하지도 배우려 하지도 않았지만 차(茶)가 이미 생활 속에 들어와 있었다. 어느 공부 모임의 말석에서 얻어 마셨던 이름 모를 차와 표정 없이도 온화했던 사람들의 어울림이 조형했던 그 장소의 온기가 내 영혼의 귀퉁이를 물들였기 때문일까. 매일매일 안달나는 커피라는 기호품에 질렸기 때문일까. 점점 표정이 옅어지는 조용한 생활이 차의 세계로 이끌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스치듯 지나치기만 했던 중앙동 ‘좋은차’에 발길이 닿았고 그곳 사장님이 쉼 없이 내려주었던 차를 몇 대접이나 얻어 마시면서 그만 차의 세계(대접)에 빠지고 말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차를 마시는 사람은 무조건 좋다며 몇년만의 만남이었음에도 ‘좋은차’에 가는 길이라는 내 말에 오랜 친구인 냥 덥석 손을 잡았던 ‘누리에’ 사장님.. 2018. 4. 22.
도시락의 세계 2018. 2. 14 작년까지만 해도 손도 대지 않았던 ‘도시락’을 요즘은 가끔씩 먹는다. 매식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원고 마감과 강좌 준비 때문에 근래는 대충 때우는 수준으로 끼니를 챙기다보니 오늘처럼 도서관에 올 경우엔 핑계 삼아 이것저것 먹어보게 된다. 오늘 저녁은 ‘한솥도시락’에서 제육치킨 도시락을 먹었다. 다대동 매장은 대체로 한산한 편이어서 책 한 권을 챙겨가서 느긋하게 먹는 편인데, 오늘에서야 ‘도시락의 세계’에 입회한 느낌이다. 직사각형의 스티로폼 용기 아랫쪽엔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밥의 영역과 그 주변을 다섯 개의 반찬이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는데, 넘칠듯한 기운 속에서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정확하게 나뉘어 담겨 있다. 모든 칸이 명징하여 하나도 허투루 담기지 않았.. 2018. 2. 14.
어느 부족의 이사 2017. 12. 23 오랜만에 들른 본가 옥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기이할 정도로 변함없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가 곧 폐교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86년 늦봄, 연산 7동 ‘고개만디’에서 또 다른 만디인 성북고개로 이사 왔을 때 아버지는 이라크에 있었고 어머니는 파출부부터 식당 주방일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일용직 노동자였다. 먼 이국 땅에서 아버지가 보내온 ‘딸라’에 빚을 더해 생애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한 어머니는 하루에 ‘세 탕’까지 뛰고도 고스톱을 치러 다닐 만큼 삶의 의욕으로 넘쳤다. 이농한 도시 빈민 출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내 부모 역시 부자가 되지 못했다. 다만 육체 노동의 세월 속에서 유일한 재산이었던 ‘몸뚱이’가 빠르게 마모되어 두 사람 모두 나란히 병을 .. 2018. 1. 12.
오늘은 뭘 안 먹지? 2017. 9. 21 나 역시 '오늘 뭐 먹지?'라는 고민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일상적인 고민은 보기와 달리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에 가깝다. 또래 집단이나 무리 속에선 오늘도 '뭐 먹을까'를 지겹게 고민 하고 또 왕성하게 생산해낸다. 지나치게 많이 먹고 닥치는대로 먹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서, 한없이 게으르게, 고민없이 고민한다. 오늘도 '골라' 먹지 않은 이들만 손해다. 손해보지 않기 위해선 맛있는 것들을 닥치는대로 먹어야 한다. 고기라서 맛있고 할인해서 맛있고 런치 세트라 맛있다. 오늘 이 맛있는 것들을 먹지 않으면 나만 손해다! ‘맛’은 통합되고 획일화되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지만 (골라 먹는) ‘맛’에 중독된 ‘뷔페 사회’의 증상! 마음 먹는다면 어제 내가 먹은 것을 빠짐.. 2017. 9. 22.
차를 좋아하는 친구 2017. 9. 12 한 계절만에 찾은 중앙동 ‘좋은 차’에서 드물게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권해주시는 분을 만났다. 두 사람만 앉을 수 있는 차 바(bar!)에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특별한 사귐의 이력은 없지만 오랜만에 만난 게 서로의 불찰이기라도 하듯 미안한 마음을 감추며 따뜻한 차를 마신다. 그 분은 본인이 매일 마시는 ‘말차’ 한잔을 내게 대접해주었고, 차에 관한 아무런 설명이 없었지만 이 차를 매일 마시는구나, 매일 매일 이 차가 이 분의 속을 달래고 보듬고 든든하게 하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드물고 귀한 차를 소개 받은 느낌이었다. 차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면. 참 좋겠다고 나직하게 말하니 천천히 나를 바라보시곤 가게를 열 시간이라 그만 가봐야겠다고, 인사를 하신다. 안녕히 가.. 2017.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