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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144

덕담도 기억해야 한다 2017. 8. 16 가끔씩 만나 밥이라고 먹는 관계는 다섯 손가락도 다 채우지 못하는 형편이니 술자리가 마련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겠다. 몇년만에 한 소설가를 늦은 술자리에서 만났다. 그는 여전히 급했고 부주의해보였다. 나 같이 일상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의 눈엔 사람을 향한 그의 호의가 유아적인 과잉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가 여전했다기보단 그를 보는 내가 여전했다라고 하는 것이 이치에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만나지 못한 사이 그는 결혼을 했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할말도 없었고 하고 싶은 말도 별로 없었기에 나는 자주 술잔을 비웠다. 마치 그러기 위해 술잔을 비우기라도 한 듯 한때 지근거리에서 비슷한 생애사의 경험을 공유했던 이들을 향한 섭섭하고 억울했던 감정들이 증상처럼 활성.. 2017. 8. 20.
산책 없이 2017. 8. 12 해질녘 몰운대를 걸었다. 처음 걷는 길 위에서 힘없이 사라지는 발자국 소리가 그동안 모르고 있던 잘못을 책망하는 것 같았다 . 모르는 길을 바장이며 조은의 시집을 읽었다. 시는 잘 읽히지 않았고 걸음도 잘 되지 않았다. 손쓰기엔 늦어버린 통지서를 받은 사람 마냥 두 계절이 지나는 동안 한번도 산책을 하지 않은 생활을 헤아려보았다. 손바닥 위의 모래처럼 형체 없이 사라져버리는 애틋한 것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고 그 무엇도 키우지 못했다. 몰운대 전망대 쪽으로 가지 않고 귀퉁이를 향해 걸었다. 초식동물처럼 두리번거리며 복숭아 하나를 달게 먹었다. 파도를 코앞에 두고 앉아 바람에 맞서 날개짓하며 허공에 멈춰 있는 갈매기들을 바라보았다. 낚시꾼들이 가끔씩 낚는 물고기들은 크기가 작았지만.. 2017. 8. 19.
무명의 무덤이 이끄는 발길 2017. 4. 16 송도에서 장림으로 삶터를 옮긴지 반년이 다되어간다. 그 흔한 공원 하나 없는 동네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들, 아이들로 넘쳐난다. 아이들의 몸짓을 눈으로 쫓다보면 퍽이나 애잔한 마음이 들곤하지만 인간적인 세속에 침윤되지 않은 것 같아 작은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아이들을 등뒤로 하고 뒷산을 오른다. 산책할 곳이 마땅치 않아 동네 어귀만을 몇번 맴돌다가 매번 걷기를 포기했었지만 이 봄볕만큼은 외면하기가 힘들다. 당연히 산책로나 이정표 따위는 없어 길은 자주 끊어져 왔던 길을 돌아나가야 하는 일이 잦다. 이쯤되면 길을 따라 걷는 것을 포기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파른 언덕 쪽으로 발길을 무심히 돌려본다. 한낮의 뒷산이긴해도 인적도, 인기척도 없는 곳에서 길을 .. 2017. 4. 28.
부상을 안고 2016. 12. 3 어두워지진 않았지만 급격히 쇠락하는 오후 6시의 햇살 아래에서 심호흡 하듯 새긴 말이 있다 . 오후 내내 갑자기 호흡이 가쁘고 심장이 가파르게 뛰어 몸이 왜 이러나 노심초사 했다. 내 몸을 급히 무너트리는 원인을, 무심한 그 폭력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당장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것까지. 노골적이고 추악한 폭력이지만 짐짓 모른 척, 은밀하게, 집단적으로 눙치며 행해지는 것이기에 전면적으로 대응하지 않고는 맞서는 것이 쉽지 않은 난관 앞에서 차마 싸우지 못하고 다만 지나가버릴 때까지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나를 발견 한다. 싸움을 시작할 수는 있다. 이런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단 끝까지 싸울 수 있는가, 끈질기게 버틸 수 있는가에 대해 답.. 2017. 4. 28.
하지 않음의 생산성 2017. 1. 14 독신 생활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사치는 자유롭게 이것 저것을 해보는 일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무언가를 중단해보는 일에 있다. ‘1인 가정’이라는 삶의 형식이 여전히 사회 속에서 버성기는 형편 속에서 독신 생활이라는 것 또한 매순간 귀찮음과 싸워야 하고 하찮음의 힐난을 견뎌야 한다. 귀찮음과 하찮음의 협공을 견뎌낸 성과란 마침내 무언가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부터 오는 성취감에 있지 않다. 자유로움의 참맛은 무언가를 하는 데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하지 않는 데 있기 때문이다. 8년 간 이어지고 있는 나의 독신 생활을 헤아려보아도 기억할만한 성취는 마침내 무언가를 중단했던 순간에 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조차 또 다른 무언가를 중단할 때만 가능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 2017. 1. 14.
지진과 내진 2016. 9. 13 2016년 9월 12일 저녁, 갑자기 건물이 흔들렸고 나는 도서관에서 그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진동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앞뒤로 흔들리는 책장이 증명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재빨리 책상 밑으로 숨었지만 나는 숨을 멈추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녁 8시 반, 수업을 하고 있는 강의실에서 다시 한번 건물이 흔들렸다. 수업은 중단되었고 나는 학생들을 향해 불안하신 분들은 강의실에서 나가도 좋다라고 침착하게 말했지만 나야말로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후 강의는 이어졌지만 예상하지 못한 위험 앞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내내 고민하며 모든 재난이 우리를 피해갈 것이라는 막연한 습관에 기대어 짐짓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재난의 징조.. 2016. 9. 13.
과일처럼 2016. 9. 6 가리는 음식은 분명해도 좋아하는 음식은 모호한 탓일까, 그 흔한 맛집 순례 한번 해보지 않은 터라 먹는 것은 '생활의 문제'일뿐 '만족의 문제'는 아니었다. 뭔가가 간절하게 먹고 싶었던 기억은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기억해낼 수 없는 것 또한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한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은 대개 정크 푸드이거나 달거나 짠 스낵류인 듯하다. 음식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는 게 조금은 안타깝게 여겨진다. '음식의 맛'이란 대개 함께 나누어 먹었던 사람들과 얽혀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커진다. 더군다나 나를 위해서 누군가가 마련한 음식 또한 없지 않았을 텐데, 그 노동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조금 한심한 일이기도 하다. 요 며칠 '과일이 먹고 싶.. 2016. 9. 6.
백야(白夜) 2016. 8. 1 동이 터도 잠들지 못하는 건 생활 리듬이 깨져버린 탓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 파괴된 것을,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 것들을 차마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그 앞에 우두커니 멈춰서게 되는 시간. 잠들지 못하는 건 빼앗긴 것들 때문이 아니라 기어코 잠들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왔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잠들 수 없는 상태에 있었지만 끝내 잠들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다. 그 애씀은 귀하고 기특하지만 서럽고 안쓰러운 일이기도 하다. 일찍 죽어버린 DJ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밤과 낮. 나는 여전히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잠들기 위해 서럽게 애쓴다. 이제 알겠다. 잠들기 위해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님을. 그들의 목소리는 신경안정제가 아니라 내게 더없이 소.. 2016. 8. 1.
돌멩이 하나 2016. 6. 29 한적하게 걷다보면 갑자기 ‘써야겠다’는 생각에 휘감길 때가 있다. 나는 이 의도 없는 찰나를 무심히 좋아한다. 욕심내지 않고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한 이 찰나가 무표정한 친구처럼 내 곁에 있어주리라는 예감 속에서 애틋함이나 아쉬움 없이 조금 더 한적하게, 무심하게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오솔길이나 외진 곳을 책을 보며 걸은 지 두달정도가 되어간다. 유난떠는 것처럼 보일까 오래전부터 생각만 하고 짐짓 꺼려왔었는데, 핸드폰을 보면서 걸어다니는 사람이 지천인 곳에서 책을 보며 걷는 게 무슨 흉일까 싶어 차가 다니지 않거나 길이 험하지 않는 곳에 산책할 땐 읽으며 걸었다. 무엇보다 기온이 올라간 탓에 오르기도 전부터 마음이 지쳐버리곤 했던 도서관에 올라가는 길에 적지 않은 동기부여를 해주.. 2016. 6. 29.
이명(耳鳴)이라는 정동(情動) 2016. 5. 30/6. 1 공사 소음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웅웅웅. 멀리서 육중한 기계 소리가 초여름 햇살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지난 여름, 광안리보다 피서객의 방문이 많았다는 송도는 올해 더 요란할 것이다. 작년에 비해 바다를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일의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매일 밤과 새벽 끊이질 않는 해변의 폭죽 소리가 생활 소음정도로 데면데면하게 여겨지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바다 중간에 교량의 지지대 같은 것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작업 소리일까. 아니면 느닷없이 입구를 폐쇄하고 때아닌 케이블카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 암남공원에서 들여오는 소리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인근 건물의 리모델링 공사 소리일까. 막연한 듯하지만 분명히 육중한 .. 2016.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