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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5

곧 더 큰 파도가 온다면 2017. 11. 15 사박사박 시는 갈팡질팡이 아니라 사박사박 어딘가로 자기도 모르게 붙좇아가다가 뜻밖의 곳에 이르러 가지고 있던 것 내던지고 입고 있던 옷 다 벗어버리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로 뛰어드는 것. ―김연희, 『넷째의 집』, 꾸뽀몸모, 2017 사박사박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 누군가가,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일까? 어쩌면 아이가 자신의 입보다 큰 과일을 베어무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소리라기보단 몸짓에 가까운 기미를 감지할 수 있는 생활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생활의 귀’에 관해서 말이다. 아마도 시인은 오랫동안 갈팡질팡 했을 것이다. 생활에서도, 시 쓰기에서도 말이다. 사박사박은 갈팡질팡의 이력 속에서 얻게 된 감각이기도 하겠다. 나는 여기서도 ‘무용한 것의 쓸모’.. 2017. 11. 16.
안녕하세요―김연희, 『작은 시집』(꾸뽀몸모, 2015) 2015. 4. 25 안녕하세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이별을 예감'하지만 그럼에도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건넬 때 그것은 당신이 지금 내 앞에 ‘있음’을 알리는 말이 된다. 그 사실을 알리면서 당신의 ‘있음’을 내가 기꺼이 증명하겠다는 말이 된다. '당신이 여기에 있음을 내가 알아요, 그것을 알고 있는 나 또한 이곳에 함께 존재함을 당신께서 목격자가 되어 말해주시겠지요.' 상대에게 안부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녕하세요’는 얼핏 그 무엇도 지시 하지 않는 텅 빈 말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바로 그 존재의 있음에 대한 알림의 말이다. 공평하며 문턱이 없고, 맑다. 우리 삶 속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 우리가 자주 이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우리.. 2015. 5. 15.
"포동포동한 손"―엄마 시집(1) 2015. 3. 30 포동포동한 손 보드랍고 흰 손 뜨거운 밥알에 데인 손 우리 아기 손 우리 아기들의 손 내가 만져본 아기들의 손 ―김연희, 「손」 전문, 『엄마시집』, 꾸뽀몸모, 2013 포동포동한 손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천천히 조용히 그러나 틀림없이 내리는 눈송이처럼 포동포동한 손은, 만져도 만져도 포동포동하다는 촉감이 사라지지 않고 포동포동함이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그 손은 축복인듯 슬픔인듯 보드랍고 하아얀 것이어서 내내 잡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 있음(生)의 의지를 피력하는 손, 그러나 삶의 의지를 피력하는 순간 그 손은 세상의 혹독함과 마주해야 한다. 그리하여 포동포동한 손은, 보드랍고 흰 손은, 붉은 손이 된다. 뜨거운 손이 된다. 그 붉고 뜨거운 손이, 생의 의.. 2015. 3. 31.
마-알간 시 2015. 1. 21 당신의 아내 나는 당신의 아내가 나라는 걸 알아요 당신의 아내는 화를 잘 내지요 요리를 급하게 해치우곤 하지요 울었다가 금방 풀렸다가 하지요 나는 당신의 아내가 나라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단 것도 내가 도무지 아내 역할을 잘 못한다는 것도 그치만 나는 당신 곁에 사는 사람 나는 당신과 살면서 나를 알아가지요 -김연희, 『작은 시집』, 꾸뽀몸모, 2015 섬광처럼 도착하는 것. 그것이 시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 서성이고 서성여야 하는 것, 시 안으로 성급히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그 주변에서 기웃거리거나 멀찌감치서 감탄하는 것. 그것이 시의 태도라고 생각했다. 기다림이 가닿을 수 없는 거리. 시의 진실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김연희의 『작은 시집』.. 2015. 1. 21.
오늘을 향해 도착하고 있는 기운 2015. 1. 20 중앙동에서 세 통의 편지를 전해 받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나를 향해 오고 있던 편지, 선물, 기운. 2014년부터 2015년을 향해 열심을 다해 도착하고 있는 것. 매일매일 정성을 다하는 것이 때론 막연하고 추상적인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럴 수 있는 것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누군가와 무언가를 맞이 하기 위해 마중을 나가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새벽, 두 달 전 친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쓰면서 기운을 내었고 또 쓰면서 위로가 되었던 이 편지가 같은 날에 씌어진 것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보낸 것들, 누군가가 누군가를 향해 가고 있는 길. 그 누군가라는 자리가 무척이나 넉넉하고 풍족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015.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