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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소6

기지개를 켜듯 접힌 시간을 펼쳐 2023년 하반기 주제를 ‘가난이라는 주름’으로 묶어보았던 것은 알게 모르게 접어둔 것들을 펼쳐보면 좋겠다 싶어서였습니다. 다시 펼쳐봐야겠다 싶어 책 사이에 책갈피를 끼워두는 것처럼 기억을 접어두는 경우도 있지만 저마다가 놓인 형편 탓에, 또 갖은 이유로 접어두어야만 했던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싶어요. 스스로도 잊고 있던 접힌 기억을 펼쳐보는 자리를 가지면 좋지 않을까, 그런데 그 자리를 솔직한 고백만이 아니라 탐구와 탐색도 함께 하면 좋지 않을까 했습니다. 가난은 우리를 움츠려들게 만들고, 멈칫하게 하고, 뒷걸음질치게 하죠. 거기에 접힌 기억과 시간이 주름져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빈곤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가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적인 것보다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2024. 2. 24.
<대피소의 문학>(갈무리, 2019) 출간 416세월호 5주기, 출간 마음껏 기뻐할 수만은 없는 오늘, (갈무리, 2019)이 출간되었습니다. 을 지탱하고 있는 두 축 중에 하나가 416세월호라는 사건입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빠른 속도로 침몰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침몰하지 않은 건 416세월호 유가족들이었고, 침몰하는 배 안에서 서로를 구했던 세월호에 탑승한 승객들로 인해 '구조 요청'의 말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구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쉼없이 누군가를 구했습니다. 그 힘에 기대어 '도움을 구하는 이가 먼저 돕는다'는 문장을 쓸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는, 책 출간은 대개 한 시절을 떠나보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권의 책이 마침내 세상에 나오는 동안 필자는 그 책에 담긴 시절과 결별할 준비를 마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 2019. 4. 16.
'회복하는 세계'를 비추는 등대 : 마을, 곳간, 대피소 1내 눈앞에 있는 가족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너머에 있는 마을에 이끌려 지낸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 때문일까? 가족은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가 된 것 마냥 대면과 응시로 마주해야 했던 순간들을 짐짓 모른 척해온 탓에 점점 더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간다. 가족 앞에서 울지 못하고 텅 빈 집에서 손 쓸 수 없는 가족을 생각하며 홀로 운다. 내가 이끌리고 있는 마을이 가족을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제 있었던 마을이 오늘은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며 몸을 움직일 뿐이다. 마을을 증명하고 있는 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하나 밖에 없다. 육식동물을 피해 산허리까지 내려온 초식동물이 강 너머의 희미한 불빛을 보고 잠시 생의 의지를 붙들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살고자 한 마을엔 나약해.. 2018. 4. 16.
대피소 : 떠나온 이들의 주소지 2015. 11. 13 망한다는 것, 결별하고야 말게 될 것이라는 ‘그 말’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함을 느낍니다. 그간 주변에 ‘글쓰기 모임’이 드물었다는 것이 ‘생활-글-쓰기 모임’의 고유성을 돋보이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 차라리 ‘생활-글-쓰기 모임’이 자생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음을 예감하며 이 모임 또한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말로 시작의 문을 열었었지요. 끝의 대한 예감으로 시작의 걸음을 내딛는 결기 속에 다소간 과장된 낭만의 뉘앙스도 느껴집니다. 그걸 무릅쓰고라도 다시금 환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 시작을 망각하는 것은 이윤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아니라면 분명 타락의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임을 ‘대피소’와 같은 곳이라 지칭했던 것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생활-글-쓰기 모임'.. 2016. 1. 19.
대피소에서, 곁의 사람에게-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2005) 2014. 11. 29 1. 편지의 알짬은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내밀한 내용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마음, 건네고 싶다는 마음의 촉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이, 수신자라는 단 한 사람이야말로 편지의 알짬인지도 모릅니다. 편지에 ‘무엇을 쓸 것인가’나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가’는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보다 편지를 쓴다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니 세상의 모든 편지엔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은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담는다니요. 그것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지를 쓸 때 멋지고 화려한 문장보다 마음을 담을 수 있는 문장을 찾기 위해 애를 씁니다. 마음을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요? 그럴 리.. 2015. 1. 28.
대피소(1) '히요식당'_장성시장 <나유타 cafe> 2014. 8. 11 / 9. 29 "홀스하우저의 급식소가 당시 자발적으로 시작된 많은 공동체 회관과 구호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것처럼, 그녀가 보여준 융통성과 다채로운 능력은 많은 재난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이다. 재앙이 닥쳤을 때, 낯선 사람들은 친구가 되고 협력자가 되며, 물건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즉석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아서 해낸다. 돈이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은 사회를 한번 상상해보자. 사람들이 서로를 구조하고 서로를 보살피는 사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함께 보내는 사회, 사람들 사이의 오랜 벽이 무너지고 아무리 가혹한 운명이라도 함께 공유함으로써 한결 가벼워지는 사회, 좋은 족으로건 나쁜 쪽으로건 한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능해지거나 실재하는 사회, .. 2014.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