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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하기5

다행(多幸)-절망하기(5) 2015. 4. 21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정전되어 있었다. 밥통을 열고 밥을 만져보았다. 온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걸보니 전원이 내려간지 3-4시간은 지난 듯하다. 초를 찾아 불을 붙였다. 심지가 안으로 말려 들어가 있어 불이 붙지 않았다. 오랫동안 불을 쬐어 초를 녹였다. 심지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를 찾을 수 없는 초, 어쩌면 심지가 뽑혀 있던 초. 냉장고에 넣어둔 식재료들이 상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속상했다. 공사 인부들이 오전부터 건물 외벽을 청소하느라 종일 물을 뿌려대던데, 아마도 그 여파로 누전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하니 더 속상했다. 어둠 속에서 잠시 발을 굴렸다. 여기 저기 수소문 한 뒤 '정전 시 대처 방법'에 따라 콘센트를 뽑고 하나 하나 확인하며 다시 켜보았다. 문제는 1층 어딘.. 2015. 4. 22.
오늘 각자의 윤리-절망하기(4) 2015. 4. 16 2015년, 다시 돌아온 4월16일.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잠깐 머금는 기일(忌日). 금식(禁食)하다. 음악을 듣지 않고, 소리내어 웃지 않고,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상복을 갖춰 입고 종일 벗지 않았다. 유별난 일도, 유의미한 일도 아님을 알면서 무용한 애도를 했다. 홀로 무용함의 목록을 늘려가는 일, 아니 채워가는 일에 집중해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애도가 '하기’(행위)가 아니라 '하지 않기’(금지)의 방법에 기대고 있음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기. 그런 것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은 것일까. 네 시간 수업을 했고 조금 읽고 겨우 메모 했다. 글쓰기 또한 '하지 않음으로써의 하기'임을 선명하게 알게 된다. 무용함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일들의 목.. 2015. 4. 17.
무릅쓴 얼굴-절망하기(3) 2015. 4. 14 “역사는 군대가 아니다. 그것은 서둘러 옆걸음 치는 게이고, 돌을 마모시키는 부드러운 물방울이며, 수세기에 걸친 긴장을 깨뜨리는 지진이다. 때때로 한 사람이 어떤 운동의 영감이 되거나 그 사람의 말이 몇십 년 뒤 그렇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는 열정적인 몇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때때로 그들이 거대한 운동을 촉발하여 몇백만이 참여하게된다. 그리고 때때로 그 몇백만을 똑같은 분노나 똑같은 이상이 뒤흔들면, 변화는 마치 날씨가 바뀌듯 우리를 덮친다. 이런 변화들의 공통점은 상상에서, 희망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도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미래에, 당신의 욕망에, 열린 가슴과 불확실성이 암울함과 안정보다 나을 가능성에 거는 것이다. 희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산다는 .. 2015. 4. 14.
"백판거사(柏板居士)"-절망하기(2) 2015. 4. 11 류영모는 잣나무로 만든 널판을 안방 윗목에다 들여놓고 낮에는 방석 삼아 그 위에 앉아 있고 밤에는 침대 삼아 그 위에서 잤다. 사람들이 류영모의 집에 찾아가 널판 위에 꿇어앉아 있는 류영모의 모습을 보고는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 칠성판 위에 있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이 든다고 하였다. 안방에 널판을 들여다놓고 그 위에서 40년 동안이나 산 이는 일류 역사에 류영모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류영모가 앉고 누운 잣나무 널판은 상가(喪家)에서 쓰는 널감이었다. (중략) 류영모가 쓴 잣나무 널판의 두께를 재어보니 3치(약 9센티미터)이고, 폭은 3자(약 90센티미터), 길이는 7자(약 210센티미터)였다. 류영모가 널판 위에 사는 전무후무한 기행을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2015. 4. 12.
절망하기(1) 2015. 4. 10 꽃 진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절망’이라는 단어만이 텅 빈 방에 오롯하다. 어째서 ‘절망’인 것일까. 이 생생한 오롯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숨죽이고 생각하다 처연히 고요해진다. 절망한다는 것. 바라던 것(望)을 버려야만 하는 일(絶), 희망이 끊어지는 것은, 희망을 단념하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그런데 절망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바라던 것을 단념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절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환기하면서 나는 눈을 뜨자마자 대면해야만 했던 이 생경한 감정을 한켠으로 밀쳐낼 수도, 애써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곧장 물어야만 했다. 절망이 ‘의지’일 수 있을까. 절망.. 2015.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