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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생활

담포포(1) 전문가의 혀와 연구자의 정좌

by 종업원 2013. 11. 26.

 

2013. 11. 22

 

 

 

 

나는 한 노인과 외출을 했다. 노인은 라면 연구만 40년. 지금부터 내게 라면 먹는 법을 가르쳐 줄 참이다.


“선생님, 국물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면이 먼저입니까?”...
“우선 그릇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형태를 감상하고 향기를 음미해 보십시오. 국물 위에는 기름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죽순이 빛나고, 해초가 천천히 가라앉고 양파가 표면 위를 부유하죠. 편육 세 조각은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죠. 핵심 역할을 담당하지만 겸손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선 라면의 표면을 어루만지고 젓가락 끝으로 살짝 만져주세요.”
“왜요?”
“라면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리고 고기를 살짝 찔러주세요.”
“고기 먼저 먹는 겁니까?”
“아니 만지기만 하세요. 그리고 고기를 들어 내어 국물에 묻어주세요. 그릇 오른쪽으로. 여기서 중요한 점. 고기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조금 후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먹기 시작합니다. 면 먼저. 면을 먹을 때는 고기를 응시하십시오. 애정을 담아서요.”

노인은 죽순을 조금 씹다가 면을 먹었다. 면을 입에 넣은 채로 죽순을 먹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국물을 마셨다. 세 번에 나눠서, 그는 반듯이 앉아 먹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마치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듯 고기를 한 조각 꺼내서 털었다.
“선생님, 무슨 의미로?”
“말리는 거지, 별 뜻은 없어.”

 -영화 <담포포タンポポ Tampopo>(이타미 주조, 1986) 中

언젠가 신문에서 본 소믈리에의 '혀'에 매혹된 적이 있었다. 여러 통에 담겨진 막걸리를 한 모금씩 맛보더니 재료와 숙성된 정도를 정확하게 맞출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 보관되었는지(술을 담고 있던 통의 재질은 무엇인지, 그 술통이 있던 장소는 어떠한 곳인지)에서부터 그 술통이 언제 어디로 옮겨졌을 것이라는 부분까지 정확하게 맞추는 것을 보고 종일 그의 '혀'를 생각한 날이 있었다. 막 등단했던 2007년 말인지, 아니면 등단하기 전 지겹도록 기거하던 대학원 열람실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의 '혀'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던 듯하다. 세상의 공기와 미세한 흐름까지 예민하게 감지하는 그런 촉수와 같은 글. 꼭 그 '혀' 때문만은 아니지만 투박한 글보다는 세밀한 글을 쓰고 싶었고 의도적으로 만연체를 구사해보기도 했다. 애둘러가기를 습관처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한편의 글을 쓰는 데 필요 이상의 시간을 투자하고 또 허비했다. 그리고 그 무용한 노동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즐겼다.

오늘, 새삼 이런 질문을 해본다. 내게 저 노인이 정성들여 먹고 있는 '라면 한 그릇'과 같은 것이 있는가? 노인에게 중요한 것은 심미적인 '혀'가 아니라 '라면'에 대한 경건한 태도다. 저 노인이 '연구자'일 수 있는 것은 '혀'를 앞세워 '라면'을 규정(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주보며 그 누구보다 라면을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에게 '어떤 라면'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라면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지금 라면과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일 것이다. 내 입 안에 숨어 있는 '혀'를 기민하게 움직여 대상을 영리하게 '맛보는 것'이 아니라 사소해보이는 미물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말없이 쌓아 올린 엄중한 시간 앞에 기꺼이 정좌(靜坐)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는 것. 나는 그것을 연구자의 태도라 부르고 싶다. 라면 앞에 기꺼이 40년 간 정좌해왔던 저 연구자에 의해 '라면'은 맛보고 먹어치워야 할 음식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가 탐구하고 또 존중해야 할 연구 대상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라면'이 살아난다. 살아나 주변을 살린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구한다. 삶의 연구자, 생활의 연구자, 우정의 연구자. 너무나 흔한 것이어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연구하는 연구자. 누구나, 언제라도 시작할 수 있는 그 연구 목록을 저 노인이 정좌하고 있던 라면을 나 또한 마주보며, 다만 여기에 적어둔다. 기민하게 움직여 스스로를 뽐내려 하는 혀를 마치 내 것이 아닌 냥 입 속 깊숙이 밀쳐두어 영영 잊어버리겠다는 듯 무심히 등을 돌리고서 말이다.

 

(12. 15 추가 부기 : '노인'은 라면의 '맛'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라면의 형태에 대해 그 익숙한 구성에 대해 다시 찬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에게 라면은 익숙해질 때로 익숙해져서 이제는 지겨운 것이 되었을 법도 한데 이제 눈을 감고도 감지할 수 있는 그 단순하고 익숙한 라면의 구성을 다시 하나하나 짚어가며, 매만져가며, 보살펴가며, 기꺼이 살려낸다. 살림을 '사는' 사람들의 몸동작을 떠올려본다. 매일 매일 쓸고 닦는 노동이 일상을 이끌고 그 소박한 세계에서 기적을 길어올린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고 또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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