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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19

긁어내고, 벗겨내고, 지우는 글쓰기 ‘하얀 바탕’이 지운 것들 글쓰기는 없던 무언가를 새롭게 더하는 일이 아니라 있던 것을 발견하거나 무언가를 빼고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생활 속에 소리 없이 쌓인 더께를 벗겨내는 것만으로도 ‘몰랐던 얼굴’을 만나게 되는 청소처럼 말이다. 하얀 바탕 화면 위에 검은색 글자를 ‘채워’나가는 작업을 글쓰기라 불러왔지만 외려 ‘하얀 바탕’을 ‘긁어’내고 ‘벗겨’내는 일에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 앞에 놓인 ‘하얀 바탕’은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백지’라기보단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안 원치 않는 역할을 떠맡거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하는 동안 쌓인 더께에 가깝다. 윗사람 앞에 설 때, 학교에 갈 때, 친구를 만날 때, 오늘도 누군가가 되어야 할 때마다 우리는ᅠ자신을 지우고 ‘하얀 바탕’이 된.. 2023. 7. 22.
깜빡임을 쫓아_96회 <문학의 곳간> 사귐 시간 주제 캐슬린 스튜어트의 (신해경 옮김, 밤의책, 2022)은 재빨리 그린 ‘캐리커처’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땐 별다른 변화가 없음에도 꼼꼼하게 기록한 ‘관찰 일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때론 낚아채듯이, 때론 지겨울 정도로 촘촘하게 우리 주변을 흘러다니는 알 수 없는 힘을, 째깍째깍 무심하게 흐르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을(아직 터지지 않았지만 터지지 않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터질 것만 같은!), ‘평범하게 들썩이는’ 온갖 것들을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떨 땐 보이고 어떨 땐 보이지 않는 것, 어느 날엔 들렸는데 어느 날엔 들리지 않는 것, 어떤 날은 읽을 수 있지만 어떤 날엔 읽히지 않는 것이 늘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할 거 같습니다. 그건 오늘 읽히지 않는다는 게 앞.. 2023. 7. 11.
평범하게 들썩이는 : 일상을 탐험하는 다섯 개의 오솔길 평범하게 들썩이는 : 일상을 탐험하는 다섯 개의 오솔길 길을 가다가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줍는 사람이 있습니다.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한 건 아닐 겁니다.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올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주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바닥에 버려진 것은 누군가의 줍는 몸짓으로 잠시 특별한 것이 됩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가진 일상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일, 허리를 숙여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줍는 일은 살림을 매만지고 다독이는 손길과 이어져 있습니다. 허리 숙여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올릴 때 무언가가 반짝하고 나타납니다. 그 반짝임을 문학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요. 2013년 여름부터 시작한 이 이라는 프로그램으로 2023년 상반기의 문을 엽니다. 아무것도 아닌.. 2023. 2. 3.
생활파(派)의 모험 2020. 8. 14 습관과 버릇에 대한 생활글을 써보자는 제안은 각자의 생활에 대한 ‘점검’과 ‘반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생활 속에서 홀로 ‘탐구/탐험’(조형) 하고 있는 ‘장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에 대한 토로조차 타임라인의 흐름 속에 휘말려 들어가 그저 하나의 게시물로 업로드 되고 업데이트되는 형편이지만, 만약 당신이 ‘생활파(派)’라면 끝없이 업로드되는 먹거리들의 아귀다툼 바깥에서 애써 조형하고 있는 원칙에 대해 할 말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가령, 오늘 (남들처럼) 먹은 것들을 전리품처럼 전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도 끝내 먹지 않은 것들의 목록 같은 것 또한 있겠지요.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은 것들, 업로드할 수 없고 업데이트가 불가능.. 2023. 1. 18.
그 사람의 말(투) 2020. 6. 27 권여선의 새 소설집엔 늙은 레즈비언의 (희박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란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소설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 미묘한 고갯짓은 오로지 디엔만이 할 수 있었고 그런 모습으로 사진에 찍힌 적도 없으니 그것은 디엔과 더불어 영영 사라져버렸다.”(91~92쪽) 오래전에 곁을 떠난 연인의 ‘고갯짓’은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서명일 것입니다. ‘디엔’의 그 서명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연인이었던 ‘데런’밖에 없겠지요. 연인이란 그렇게 오직 서로만이 알아볼 수 있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겠습니다. 마음의 모국어라고 할까요, 희박한 언어를 공유하던 이가 떠나버리면 (마음의) 모어를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버려 내내 외국인처럼 살아가야.. 2023. 1. 9.
끄트머리 눈곱처럼 작은 글씨 2022. 12. 7 ‘농촌 어린이 시집’ 『일하는 아이들』은 이오덕 선생이 1958년부터(1952년 것도 한 편 들어가 있다) 1977년까지 20년 동안 주로 농촌 아이들과 함께 쓴 시를 그때그때 모아두었던 것을 엮은 책이다. 지난날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의 마음을 품은 시집이라는 드문 책이지만 으레 작고 연약한 것을 굽어보는 나쁜 버릇이 발동해(티나지 않게!) 은근히 업신여기며 한쪽으로 미뤄두고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다가, 이오덕 선생의 발자취를 뒤쫓다보니 자연스레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고침판 머리말」을 읽자마자 한동안 넋을 놓고 말았다. 단박에 여러 꼭지를 읽지 못하고 한두 꼭지정도만 겨우 읽고 오래도록 뒤척인 탓에 책을 읽는 방식을 바꿔보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야 책을 펼치는 게 아니라 맑.. 2022. 12. 7.
각자의 '짐승' 일기 2022. 10. 29 김지승의 『짐승일기』는 ‘쓸 수 없는 것들’을 쓰려고 하는 의지로 가득합니다. 날짜가 아닌 요일로 재편집되면서 선형적인 시간성이 흐트러지고 사건과 감정의 희미한 인과도 지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읽을수록 감정과 사건이 누적되는 게 아닌 어딘가로 휘발되어버리는 특이한 읽기 체험을 하게 됩니다. 형용모순이지만(무엇보다 수사적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짐승일기』를 읽으면서 내내 ‘지우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걸 지우는 게 아니라 ‘어떤 것들’을 지워가는 글쓰기 말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의 글쓰기 속에도 ‘어떤 것들을 지우기 위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잊지 않으려 무언가를 기록하려고 할 때조차, ‘남겨두려는 의지’가 기어코 서 .. 2022. 10. 29.
<대피소의 문학>(갈무리, 2019) 출간 416세월호 5주기, 출간 마음껏 기뻐할 수만은 없는 오늘, (갈무리, 2019)이 출간되었습니다. 을 지탱하고 있는 두 축 중에 하나가 416세월호라는 사건입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빠른 속도로 침몰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침몰하지 않은 건 416세월호 유가족들이었고, 침몰하는 배 안에서 서로를 구했던 세월호에 탑승한 승객들로 인해 '구조 요청'의 말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구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쉼없이 누군가를 구했습니다. 그 힘에 기대어 '도움을 구하는 이가 먼저 돕는다'는 문장을 쓸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는, 책 출간은 대개 한 시절을 떠나보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권의 책이 마침내 세상에 나오는 동안 필자는 그 책에 담긴 시절과 결별할 준비를 마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 2019. 4. 16.
'회복하는 세계'를 비추는 등대 : 마을, 곳간, 대피소 1내 눈앞에 있는 가족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너머에 있는 마을에 이끌려 지낸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 때문일까? 가족은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가 된 것 마냥 대면과 응시로 마주해야 했던 순간들을 짐짓 모른 척해온 탓에 점점 더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간다. 가족 앞에서 울지 못하고 텅 빈 집에서 손 쓸 수 없는 가족을 생각하며 홀로 운다. 내가 이끌리고 있는 마을이 가족을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제 있었던 마을이 오늘은 없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며 몸을 움직일 뿐이다. 마을을 증명하고 있는 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하나 밖에 없다. 육식동물을 피해 산허리까지 내려온 초식동물이 강 너머의 희미한 불빛을 보고 잠시 생의 의지를 붙들 수 있는 것처럼 내가 살고자 한 마을엔 나약해.. 2018. 4. 16.